기업들, 새 정부 ‘相生’ 강조에 CSR 경력자 구인 전쟁

[‘인재사냥’ 나선 기업들]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 상생 강조하자 사회공헌팀 확충 바람
4~5년 경력자는 뺏기고 뺏는 전쟁… 헤드헌팅 업체도 등장

조선일보 DB
조선일보 DB

대기업 사회공헌팀에서 5년 넘게 일하고 있는 A씨는 최근 기업 5곳으로부터 “CSR 경력자를 채용하니 우리 회사로 와달라”는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제안을 한 곳은 10대 그룹을 포함, 모두 업계 1~2위를 다투는 대기업들이었다. A씨가 “이직 의사가 없다”며 거절하자, 이들은 “사회공헌 경험이 풍부한 CSR 담당자를 찾고 있다”면서 “주변의 좋은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거듭 부탁했다. A씨는 “알고보니 4~5년차 CSR 담당자들 대부분이 해당 기업들로부터 이직 제안을 받았다고 하더라”면서 “최근 대기업들이 CSR 경력자 찾기에 혈안이 된 느낌”이라고 귀띔했다.

◇들썩이는 대기업 CSR 채용 시장

CSR 경력자들의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채용하는 곳은 많은데 인력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재 사회공헌 담당자를 채용 중인 S기업, H기업, 국내의 한 유명 방송사 모두 ‘최소 4년 이상 CSR 업무 경력’을 자격요건으로 두고 있다. ㈜더베이직하우스는 CSR·마케팅 경력자를, 삼성디스플레이는 2년 이상 유사 업무를 담당한 사회복지사를 채용 중이다. 사회공헌 담당자들은 “그동안 CSR 경력자 채용은 일년에 많아야 3~4건에 불과했는데, 올해는 기업 사회공헌 시장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런 현상은 올해 CSR 조직을 개편·확대하는 기업이 늘면서 본격화됐다. 지난해 7월, CSR 전담 부서를 신설하면서 직원 4명을 배치한 롯데그룹은 올해 3명을 더 충원했다. LG 유플러스는 홍보부 내의 CSR 전담 인력을 5명으로 확대했고, 매일유업도 올해 사회공헌팀을 새로 꾸렸다. C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대기업의 ‘상생’을 강조하자, 우리 회사도 CSR 전담 인력을 확충하기 시작했다”면서 “아마 다른 대기업들도 비슷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CSR 채용이 활발해지자 사회공헌 전문가가 필요한 기업들은 서둘러 인재 찾기에 나섰다. D기업 관계자는 “경력자가 원하는 연봉 수준에 되도록 맞춰주려는 분위기”라고 했다.

◇베일에 싸인 경력자 채용 과정

CSR 경력자 채용은 주로 비공개로 진행된다. 잡코리아, 인크루트, 사람인 등 취업 포털 사이트에도 채용을 진행하는 기업의 명칭이 공개되지 않는다. ‘국내 TOP 대기업 사회공헌 경력자 채용’, ‘직원 1000명 이상 글로벌 그룹사 CSR 경력자 채용’ 등 대략적인 정보만 제공한다. 포털에 기재된 채용 담당자에게 연락을 하면, 해당 기업이 아닌 헤드헌팅 업체로 직접 연결된다. 스카우트 제의도 헤드헌터를 통해 이뤄진다. 스카우트에 성공한 헤드헌팅 업체는 해당 기업으로부터 채용된 직원 연봉의 20~30%를 수수료로 받는다. 대신 기업은 헤드헌터에게 담당자 ‘입맛에 맞는’ 자격요건을 제시할 수 있다.

최근 스카우트 제안을 받은 한 CSR 실무자는 “지난해 CSR 경력자를 채용한 D기업이 헤드헌터에게 서울대 출신만 골라달라고 했다더라”면서 “최근엔 성별을 남자로 한정해달라거나, 대기업 경력자만 받는다는 등 요구가 다양해졌다”고 귀띔했다. 채용 과정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지는 이유는 또 있다. K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CSR 시장이 워낙 좁기 때문에 경력자 채용은 기업들끼리의 ‘뺏고 뺏기기’ 전쟁”이라면서 “채용 과정이 잘못 공개되면 담당자도 ‘배신자’ 낙인이 찍힐 수 있다”고 했다. 사회공헌 경력자 수가 워낙 적다보니 면접 과정에서 민망한 일도 발생한다. S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모 기업이 경력자 채용을 단체 면접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친한 후배와 나란히 앉게 된 적이 있었다”면서 “면접 자리에서 후배를 추천하고 나왔다”고 말했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CSR 경력자들

최근 5년차 경력자를 뽑는 한 기업 사회공헌팀은 걱정이 많다. 벌써 한 달째 마땅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 그룹 차원의 신규 CSR 전략을 미뤄둔지도 오래다. 현재 헤드헌팅 업체를 통하지 않고 지인을 통해 경력자 추천을 받는 중이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에 채용 공고를 올리고, 관련 실무자들 모임에도 나가 홍보했지만 성과가 없다. 이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는 “사회공헌 신규 사업을 기획하려면 CSR 경력이 많은 분이 필요한데, 5년차 이상 경력자는 좀처럼 지원하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처럼 경력자를 구하지 못해 채용 기간을 늘리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K기업 CSR팀 관계자는 “CSR 경력자 수는 한정돼있기 때문에, 사회공헌팀을 신설하는 기업이 많아질수록 경력자들의 몸값은 점점 올라간다”면서 “경력자를 구할 때까지 일단 신입이나 계약직을 채용해 인력을 보충하는 기업도 많다”고 말했다. CSR 경력자들이 이직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영리단체와 기업에서 8년간 경력을 쌓은 한 담당자는 “5년차 경력이면 해당 기업의 대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직접 설계한 이들이 대부분이라서, 본인이 만든 사업에 애착을 갖기 마련”이라면서 “CSR 담당자가 바뀌면 프로그램이나 수혜기관도 전부 바뀌기 때문에, 신중하게 결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H기업 CSR 실무자는 “그룹 계열사 사회공헌팀은 그룹 시스템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담당자의 권한이 굉장히 적은 편”이라면서 “기획은 없고 운영만 하는 구조는 경력자들이 선호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