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기후금융이 온다] 10조원대 ‘탈석탄금고’ 누가 차지할까?

②기후변화 막는 탈석탄금고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연간 10조원에 달하는 서울시교육청의 ‘금고’를 관리할 은행이 올 하반기 새롭게 결정된다. 은행들로선 4년 만에 찾아온 기회다. 이번에 선정되면 4년간 서울시교육청의 금고지기 역할을 하며 총 40조원을 굴릴 수 있게 된다.

최근 여기에 변수가 등장했다. 이달 초 서울시교육청이 ‘탈(脫)석탄금고’를 선언하면서 은행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금고를 선정할 때 “석탄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공표한 은행을 우대해주는 것을 탈석탄금고라고 한다. 우리나라 17개 시도 교육청 가운데 탈석탄금고를 선언한 건 서울시교육청이 처음이다.

현재 국내 은행 대부분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는 석탄산업에 투자하고 있다. 만약 5대 민간은행(신한·KB국민·우리·KEB하나·NH농협) 가운데 어느 한 곳이 먼저 탈석탄 투자 선언을 한다면 1~2점 차로 당락이 결정되는 금고 선정 경쟁에서 매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쩐의 전쟁’에 끼어든 기후변화 이슈

지난 3월 25일.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기후솔루션, 환경운동엽합, 청소년기후행동,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등 9개 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종로구에 있는 서울시교육청 앞에 피켓을 들고 모였다. 막대한 예산이 담긴 교육청의 금고를 탈석탄금고로 전환하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시위에 참여한 장마리 그린피스 캠페이너는 “탈석탄금고라는 용어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방법은 간단하다”면서 “100점 만점인 금고 입찰 평가에서 ‘탈석탄’ 관련 항목을 추가해 점수로 반영하면 된다”고 말했다. 금고 입찰에 참여하는 은행이 ▲탈석탄 선언을 했는지 ▲탈석탄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기존 석탄산업 투자를 중단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했는지 등을 따져 교육청 금고를 맡기라는 것이다.

청소년 활동가들로 구성된 청소년기후행동은 “기후위기가 미래세대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미래세대 교육을 담당하는 서울시교육청이 탈석탄금고 지정을 통해 기후위기 대응에 앞장서 달라”고 호소했다. 한경옥 서울시교육청 교육재정과 주무관은 “청소년은 기후위기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목소리를 높이는 세대”라며 “서울시교육청도 이에 대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탈석탄금고 전환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전국 지자체와 교육청의 금고 입찰은 보통 4년에 한 번씩 진행된다. 입찰에 성공한 은행은 연간 최소 수천억원에서 최대 수십조원의 예산을 관리·운용할 수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쩐의 전쟁’이라 불리는 은행들의 금고 쟁탈전에 환경단체들이 끼어든 이유는 금고의 재원이 ‘세금’이기 때문이다. 세금으로 조성된 금고는 ‘공공성’ ‘수익성’ ‘안정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따라 지정돼야 하는데, 은행들이 하고 있는 석탄산업 투자가 이 세 가지 원칙에 모두 위배된다는 게 환경단체들의 주장이다.

이지언 환경운동연합 국장은 “석탄산업에 대한 투자는 환경오염을 일으켜 공공성을 해칠 뿐 아니라 금고의 재무적 안정성과 수익성까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석탄산업에 대한 규제를 본격화할 경우 석탄발전소는 ‘좌초자산(경제적 수익을 내지 못하는 자산)’이 된다”면서 “국내 은행들이 이런 상황을 무시하고 계속 석탄산업에 투자한다면 은행들이 맡고 있는 지자체와 교육청의 금고도 덩달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탈석탄금고, 한국형 기후금융 모델

탈석탄금고는 국내 금융기관들의 탈석탄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한국형 기후금융(Climate Finance)’ 모델이다. 기후금융은 환경을 해치는 투자 대신 환경을 살리는 투자가 이뤄지게 만드는 금융지원체계를 가리킨다. 유럽 등 해외 금융기관들이 최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가 바로 기후금융이다.

탈석탄금고를 최초로 제안한 한국사회투자책임포럼의 이종오 사무국장은 “일종의 넛지(Nudge·어떤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라고 설명했다. 금융기관을 직접 압박하는 게 아니라, 지자체와 교육청 등 금고를 가진 곳들을 움직여 금융기관이 스스로 탈석탄 투자라는 바람직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친(親)시장적인 기후금융 모델이라는 것이다.

금융기관들의 탈석탄 선언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지난 3월 기준 해외 1187개 기관투자자가 화석연료 관련 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파슬 프리 캠페인(fossil free campaign)’에 동참하고 있다. 세계 최대 연기금인 노르웨이 국부펀드,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인 캘퍼스, 독일의 알리안츠그룹 등 주요 금융기관들이 줄줄이 캠페인에 합류하며 탈석탄 투자를 선언한 이유는 석탄산업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이 이달 초 17개 시도 교육청 최초로 ‘탈석탄금고’를 선언했다. 연간 10조원에 달하는 교육청 금고를 관리할 은행을 선정할 때 “석탄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은행을 우대하겠다는 것이다. 사진은 지난 3월 25일 청소년 단체와 환경·시민 단체 소속 활동가들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탈석탄금고’ 지정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모습. /환경운동연합 제공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사학연금과 공무원연금이 최초로 탈석탄 투자를 선언했다. 지난해 DB손해보험, 한국교직원공제회, 행정공제회 등도 탈석탄 투자를 선언했지만 규모와 영향력이 훨씬 큰 공적금융과 민간금융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국책은행인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을 비롯해 대형 시중은행들도 눈치만 보고 있다.

익명을 요청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국내 금융회사들도 탈석탄 투자가 대세라는 걸 인식하고 있고 내부적으로는 대비하기 시작했다”면서 “다만 공개적인 ‘선언’은 부담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언을 하게 되면 ‘액션’이 뒤따라야 하는데 현재 모든 은행이 석탄산업에 투자하고 있어서 정리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다.

‘탈석탄 선언 할까 말까’ 고민 깊어지는 은행들

올해 전국 17개 시도 교육청의 금고 규모는 73조 9002억원이다. 이 중 부산을 제외한 모든 교육청의 금고를 NH농협은행이 가지고 있다. 16개 시도 교육청 연간 예산 69조2943억원을 NH농협은행이 관리하는 것이다. 4조 6059억원 규모의 부산시교육청 금고만 부산은행이 사수하고 있다.

교육청 최초로 탈석탄금고 테이프를 끊은 서울시교육청은 ‘교육청 금고지정 및 운영 규칙’을 개정해 탈석탄 선언과 관련된 평가 항목을 신설할 예정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탈석탄 관련 배점은 1~2점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6월경 입찰공고를 내고 평가를 진행해 하반기 정도에 은행을 최종 선정한다는 계획이다.

탈석탄금고 선언이 다른 시도 교육청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올해 금고 입찰을 앞둔 대구교육청, 강원교육청, 제주교육청, 부산교육청부터 영향을 받을 것이란 분석이다. 탈석탄금고 붐(boom)이 교육청을 넘어 전국 지자체로 번질 가능성도 높다. 지자체 중에서는 충청남도가 먼저 깃발을 꽂았다. 충남도는 지난해 금고 재지정을 앞두고 전국 지자체 최초로 ‘탈석탄금고’를 선언했다. 2020년 기준 전국 지자체 금고 규모는 380조2425억원. 경기도 예산이 77조 4037억원으로 가장 많고, 서울시가 61조6558억원으로 뒤를 잇는다. 지자체 금고를 가장 많이 보유한 곳도 NH농협은행이다. 전국 지자체 금고의 59.7%를 가지고 있다.

기후솔루션에 따르면 NH농협이 속한 농협금융지주는 약 4조2600억원 규모의 석탄 투자를 진행 중이다. 교육청과 지자체가 연쇄적으로 탈석탄금고를 선언할 경우 NH농협은행의 고민도 깊어질 수밖에 없다. NH농협은행 관계자는 “농협은 초창기부터 지자체와 교육청의 금고를 관리해왔다”면서 “신규 고객 유치나 부대거래 등도 금고를 통해 많이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고 시장은 은행들에겐 놓치기 아까운 수입원이다. 지난 2018년 신한은행이 무려 3000억원의 협력사업비를 서울시에 기부하기로 약속하면서 금고를 따낸 것도 그 이상의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재지정을 앞둔 서울시교육청의 금고도 마찬가지다. 이종오 사무국장은 “서울시교육청 금고를 얻는다는 건 단순히 연간 10조원을 수주한다는 의미를 넘어선다”면서 “교육청 공무원들의 월급 통장이 바뀐다는 뜻이고, 그걸 통해 예·적금과 대출 등 다양한 거래가 일어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 사무국장은 “국내 은행들의 기후위기 대응이 해외 국가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탈석탄 선언을 하는 은행이 나온다면 ‘기후금융을 선도하는 은행’이라는 명분과 ‘금고’라는 실리를 모두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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