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 아이 부모들 미국 향하는 이유…
장애인 자립 도와주고 기업서 고용률 높아
TV 토크쇼 출연시켜 시민들 인식 개선도
5년 전, 발달장애 자녀를 키우는 어머니들을 만난 적이 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물으면, “훌륭하진 못해도, 행복하게 키우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이야기하는 분들이었다. 자녀들이 발달장애 관련 전문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게 유일한 아쉬움이었기에, 어머니들은 직접 음악·미술·언어치료를 배워 서로의 자녀들에게 베풀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이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자 학교 적응이 어려워졌다고 했다. “사회 전체가 아이들을 따돌리는 것 같다”면서 하나 둘 미국으로 떠났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도 행복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궁금했다. 발달장애 아이들을 키우는 많은 부모가 한국 사회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미국으로 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교육 방식의 차이일까, 복지 시스템의 차이일까. 아니면 수십, 수백년간 쌓여온 역사나 문화의 차이 때문일까. 장애에 대한 인식이 높은 곳으로 꼽히는 도시, 미국 시카고를 향하면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었다.
“발달장애국 직원들의 인식부터 개선시키는 것이죠.”
미국 일리노이주 발달장애국(ICDD) 총 디렉터 마거릿(Magaret Harkness)씨가 미소를 보였다. “ICDD의 중요한 역할은 민간 기업과 일반시민을 대상으로 발달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차별을 없애는 일입니다. 미국 기업엔 장애인을 몇 퍼센트 이상 고용해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지 않지만, 높은 고용률이 유지되고 있죠. 이는 똑같은 조건의 회사 두 곳이 정부에 차를 판매할 경우, 장애인을 더 많이 고용한 기업이 선택되는 암묵적인 시스템 때문입니다.”
미국이 발달장애법을 제정하고, 모든 주(州)에 발달장애국(Development disability councils)을 설치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발달장애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구직을 돕는 것이 발달장애국의 주 역할이다. 주지사가 발달장애국의 모든 직원을 임명하는데, 그중 60% 이상을 발달장애인으로 구성해야 한다.
ICDD의 협력기관인 시카고 상공회의소(Chicagoland Chamber of Commerce) 디렉터 조(Joe Chiappetta)씨가 말을 이어받았다. “시카고 상공회의소는 장애인 고용에 호의적인 기업의 홍보를 맡고 있습니다. 일반 시민들에게 장애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는 이 기업이 얼마나 훌륭한지 적극적으로 알려주고, 이미지 개선을 해줍니다. 이는 상공회의소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업무에 속합니다.”
조씨는 발달장애국과 장애 관련 기관들의 협업 시스템도 소개했다. 시카고 상공회의소, 장애인고용기관, 발달장애인 지원센터, 장애인 관련 비영리단체(NPO) 등 4개 기관은 발달장애국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정기 모임을 갖고, 발달장애인의 취업을 위해 협력하고 있었다.
“장애인을 위해 일하는 기관과 단체 수가 많다 보니, 서로 일을 중복해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발달장애인 한 명이 두 개 이상의 기관을 통해 취업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요. 장애인고용기관·발달장애인지원센터·관련 NPO들이 취업을 원하는 발달장애인 리스트를 통합해주면, 상공회의소가 기업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ICDD는 4개 기관의 정기 모임을 주최할 뿐만 아니라, 협업 시스템에 참여하는 기관에겐 별도의 재정적인 지원을 하면서 ‘소통과 협력’을 유도하고 있죠.”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ICDD의 인식개선 사업도 인상적이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발달장애인을 텔레비전 토크쇼에 출연시켜 일반인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최근엔 온라인 시스템 하나를 개발했다고 한다. 네티즌이 발달장애인을 나쁘게 칭하는 용어를 트위터에 쓸 경우, 그의 글이 온라인상에 개별적으로 공개되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마거릿씨는 미국이 장애 선진국이라 불릴 수 있게 된 이유를 명쾌하게 정리해줬다.
“법과 시스템을 잘 정비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정부 차원에서 일반 시민과 기업을 대상으로 다양한 인식개선 모델을 개발해야 합니다. 그런 후엔 기다리세요. 누군가의 인식을 바꾸려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미국도 법과 시스템을 정비하고 40년간 인식개선 활동을 벌이며 기다렸습니다.”
사실 굳이 묻지 않아도, 미국에 도착한 순간부터 기자의 의문은 이미 풀려 있었다. 공항에서 푸른색 통과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던 직원도, 마트에서 계산을 하던 캐셔(Cashier)도, 박물관에서 길 잃은 아이를 도와주던 직원도 모두 발달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웃렛 몰 앞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해달라’며 말을 건네던 청년도 발달장애인이었다.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일반인과 어울려 자유롭게 춤을 추는 발달장애 청년들의 모습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기자 외엔 아무도 이러한 모습을 신기해하거나, 불편해하지 않았다. 맘 속에 편견의 장애를 가진 건 바로 기자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