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기구 지원 현실
그들의 한숨_수리한 지 3일 만에 말썽
그마저도 부품 단종돼 못 고치고 방치 ‘애물단지’
개별 장애 특성 무시하는 정부 일방적인 지원까지
한편_삼성, 아이캔 보급 사업 부담 없이 쓸 수 있도록 저렴한 재료로 개발 연구
“남의 걸 빌려 타고 왔다.”
김영호(63·경기 의왕시)씨가 인상을 찌푸렸다. “전동 스쿠터를 지원받았는데, 툭하면 고장이 났어요. 5년 사이에 수리비만 200만원 넘게 들었죠. 그 와중에 제조 회사는 부도가 나버렸고, 부품이 단종돼서 이젠 수리를 받지도 못해요.”
건강하던 김씨가 쓰러진 것은 2003년 7월. 뇌병변으로 왼쪽 마비 판정을 받고 2급 지체 장애인이 됐다. 2007년 무렵 김씨는 “정부가 80%를 부담해준다”는 보조기구 판매원의 말을 듣고 K상사의 전동 스쿠터를 167만원에 구입했다. 기구 값의 20%는 본인 부담이었다. 정부에서 정한 이용 기한은 6년. 하지만 이 전동 스쿠터는 ‘애물단지’가 됐다. 중국제 기구는 툭하면 말썽을 일으켰다. 1년간의 무상 서비스 기간이 끝나자, 수리비가 쌓여갔다. 수리를 마친 부분이 3일 만에 다시 탈이 난 적도 있었다. 김씨는 당시 “너무 억울해서 경찰에 신고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전동 스쿠터는 집 한편에 방치됐다. 제조 회사가 부도나서 이젠 수리조차 불가능하다. 김씨는 내년 4월이 되어야 새 기구를 지원받을 수 있다. 그때까지는 얻어 타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보조기구 역할은 늘었지만…
장애인이나 노약자 등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보조하는 기구를 ‘보조기구’라고 한다. 6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한국의 스티븐 호킹’ 이상묵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가 사용하는 머리로 운전하는 전동 휠체어, 음성으로 작동하는 컴퓨터 등이 모두 보조기구다. 장애의 특성과 정도에 따라 사용 기기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2만여 개나 되는 보조기구가 있다.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우리나라는 앞으로 보조기구 수요가 점점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의 보조기구 시장은, 아주 비싸서 웬만해선 사기 어렵거나 값은 싸지만 품질이 나빠 사용하기 힘든 것들만 존재하는 ‘기형적’인 형태다. 권성진 경기도 재활공학서비스 연구지원센터 부장은 “정부 지원 전동 기기의 이용 기한이 6년인 데 반해, 수입되는 저가 제품은 내구성이 떨어져 3년도 못 타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전동 스쿠터가 창고에 처박힌 이유다.
2003년 뇌병변으로 하반신과 왼팔을 쓸 수 없게 된 박종선(54·경기 군포시)씨의 전동 휠체어에는 쇠사슬이 묶여있다. “휠체어에는 의자를 뒤로 눕히는 기능이 있어요. 앉아만 있는 이용자들은 이 기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허리도 아프고 욕창도 생길 수 있어요. 원래 이 전동 휠체어는 레버가 오른쪽에 있었어요. 근데 휠체어의 기어를 수리하면서, 왼쪽으로 옮겨졌어요. 대만의 제조 회사가 모델을 바꾸면서 위치가 바뀐 거죠. 나는 왼팔을 못 쓰기 때문에 오른손으로 당길 수 있게 쇠사슬을 왼쪽 레버에 연결했어요.”
박씨는 2007년 보조기구 지원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됐지만, 정부가 주는 중국제 전동 휠체어는 탈 수가 없었다. 몸집이 큰 박씨가 앉을 수 없는 크기였기 때문. 박씨는 고심 끝에 정부에서 보조하는 166만원에 자비 200만원을 더해 지금의 휠체어를 샀다. 식당 일을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그나마 탈 수 있는 것 중 가장 저렴한 것”을 선택한 것. 쇠사슬이 묶여 있는 바로 그 휠체어다.
◇일방적인 지급 방식 아쉬워
현재 정부에서 장애인들의 보조기구 구입비 일부를 지원해주는 공적 급여 예산은 1500억원 정도다. 복지 선진국에 비해서는 부족하지만, 지난 2008년(1000억원) 이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특히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행된 2009년부터 크게 늘었다. 문제는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장애인 개개인의 몸 상태, 활동 반경, 기구의 이용 목적 등 개별적인 진단에 맞춰 지급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 과정이 일방적이고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김종배 국립재활원 재활연구소 부소장은 “이상목 교수는 팔을 아예 못 써서 휠체어에 팔을 묶어 놓고, 전동 휠체어도 헤드 레스트(Head Rest·좌석 등받이 맨 위쪽의 머리를 받치는 부분)에 달린 특수 컨트롤러로 조정한다”며 “미국에서 진단을 받고 지원받은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우리나라라면 이런 분들에게도 똑같이 200만원 수준의 휠체어를 제공한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에서도 보조기구 ‘서비스’ 개념이 생겨나고 있다. 2004년 설립된 경기도 재활공학서비스 연구지원센터는 장애인 상담과 진단을 통해 필요한 기기를 함께 정하고, 이를 보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지난 1996년 교통사고로 1급 장애인이 된 김현성씨(47·경기 의왕시). 수협에 다니던 착실한 직장인이었던 김씨는 사고로 온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됐다. 그는 현재 집에서 틸팅 휠체어(Tilting Wheelchair· 좌석과 등받이가 뒤로 젖혀지는 기립형 휠체어)를 사용한다. 임명준 국립재활원 중앙보조기구센터 공업연구사는 “전신이 마비된 분들에게 ‘틸팅’ 기능은 꼭 필요한데, 일반 휠체어에 이런 기능을 더하려면 300만원 정도가 더 들어간다”고 말했다. 김현성씨는 올 5월 경기도 재활공학서비스 연구지원센터를 통해 이 기기를 지원받았다. 김씨는 “앉아만 있으면 배변에 문제가 생기는데, 장운동이 원활해졌다”며 “유일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정신적으로 많이 안정이 된다”고 했다.
◇가격 낮춰 보급 확대하는 방안도 필요
1000만원이 넘는 값비싼 보조기구 가격을 낮추는 연구도 국내 보조기구 분야의 향후 과제다. 삼성전자 창의개발연구소의 ‘아이캔(eyeCan)’ 보급 사업은 좋은 모델이다. 삼성전자 창의개발연구소는 눈동자만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안구 마우스’ 비용(약 1200만원)이 지나치게 높다고 판단, 5만원 이내의 재료비로 제작 가능한 아이캔을 개발했다. 1년간 연구를 마친 후 지난 3월, 삼성전자는 한국장애인개발원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장애인의 개별 상황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경기도 재활공학서비스 연구지원센터와 국립재활원과도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 현재는 1차 대상자 100명 모집을 마치고, 가정 방문 및 현장 평가를 앞둔 상황이다. 임명준 연구사는 “아무리 싸게 잘 만들어도 만들기만 하면 의미가 없다”며 “전문 기관 세 곳과 협력해 필요한 사람 특성에 맞춰주려고 한 것은 굉장히 좋은 시도”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