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일(토)

“아파도 병원 갈 엄두 못 냈는데… ‘마을 주치의’가 효자”

르포 ‘마을 주치의제’ 시행 중인 충남 공주에 가다
월 1회 이상 전문의료인, 오지마을 166곳 돌며 내과·한의과·치과 진료
마을 주민 98.4% “계속 운영됐으면…”
의료법상 순환진료는 건강보험 청구 안 돼… 대부분의 보건기관 비용부담으로 중도 포기

미상_그래픽_의료복지_청진기_2012소나무 숲이 울창한 산길은 구불구불했다. 능선 아래엔 기와집 몇 채뿐. 이곳은 충남 공주시 유구읍 노동리 오지마을. 논두렁을 오르는 김옥희 할머니(77)의 느린 걸음을 따라 마을회관에 도착하니, 신발 50켤레가 겹겹이 포개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할머니들이 얼굴·팔·다리 곳곳에 침을 꽂은 채 누워 있었다. 옆방에선 할아버지들이 팔을 걷고 혈압을 재고 있었다. 이날은 ‘마을 주치의’가 노동리 마을을 찾은 날. 보름에 한 번 있는 아주 특별한 날이다.

“우리 마을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병원에 가질 않아. 시내까지 적어도 한 시간 반은 걸리거든.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는데, 이제 병원까지 안 가도 직접 와주니까 걱정이 없어졌지.”(김옥희 할머니)

◇충청남도, ‘우리마을 주치의제’ 도입

충청남도는 지난해 ‘우리마을 주치의제’를 도입했다. 의료 사각지대에 있던 오지마을 166곳을 선정해, 매달 한 차례 이상 진료·상담·건강 교육 등을 실시하는 프로그램이다. 보건소·보건지소 소속 의사와 간호사가 직접 마을을 찾아가 내과·한의과·치과 진료를 본다. 혈압·당뇨검사는 물론, 노인체조·웃음치료 등 건강증진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진료를 받은 도내 농어민 수는 3만9120명, 상담 및 건강교육을 받은 인원까지 합하면 11만4431명에 이른다.

공주시 보건소 부혜숙 소장은 “기존의 방문보건사업은 ‘진료’보다는 ‘복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독거노인 등 소외계층을 찾아가 건강을 체크하는 상담자 역할을 한다”며 “이에 반해 ‘마을주치의제’는 의사·간호사 등 전문의료인력이 직접 마을 전체주민을 만나 진료를 하고, 만성질환을 관리한다”고 말했다. 방문보건사업이 차상위계층을 비롯, 보건기관에 등록된 소외계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우리마을 주치의제’는 마을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한다.

진료를 마친 유구 보건지소 공중보건의 이가원씨는 “의료 취약지역일수록 자주 병원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하다”며 “꾸준한 혈압체크만 해도 뇌졸중, 심혈관계 질병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고 했다.

보름에 한 번 '마을주치의'를 만나는 충청남도 산골마을 주민들. 의사가 주민과 얘기하는 모습.
보름에 한 번 ‘마을주치의’를 만나는 충청남도 산골마을 주민들. 의사가 주민과 얘기하는 모습.

◇’마을 주치의제’ 충남 과 전북 완주 2곳

‘우리마을 주치의제’에 대한 주민 반응은 좋다. 올해 공주시의 조사에 따르면, 98.4%의 주민이 참여 후 건강에 “도움이 됐다”며 , “마을 주치의제’가 계속 운영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부소장은 “마을에서는 적어도 한 시간 동안 의사에게 진료 상담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친밀감이 형성되고 의사를 향한 주민 신뢰도가 깊어져 이용률도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마을 주치의제’를 실시하고 있는 곳은 충청남도와 전라북도 완주군 2곳뿐이다. 의료법상 순회진료를 제한하는 규정 때문이다. 요양급여의 적용기준 및 방법에 관한 세부사항(고시)은 ‘보건기관에서 의료기관 외의 장소에서 의료행위를 할 경우, 해당 비용을 건강보험에 청구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료취약지역 주민을 위해 순회진료를 할 경우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의료 사각지대를 찾아 순회진료를 하던 대부분의 보건기관들이 인력과 비용의 벽에 부딪혀 중도에 포기했다. 전라북도 완주군 보건소 관계자는 “우리처럼 규모가 작은 보건소는 환자들을 모두 수용하기 어렵고, 오지마을이 많아 찾아가는 방문진료 시스템이 훨씬 효율적”이라며 “보건의료서비스에 대한 지자체의 강력한 의지 덕분에 지속적인 운영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1 웃음치료사와 주민들. 2 혈압을 체크하는 의사. 3 치과위생사.
1 웃음치료사와 주민들. 2 혈압을 체크하는 의사. 3 치과위생사.

◇지속가능한 ‘마을 주치의제’ 운영 필요

‘마을 주치의제’를 운영하려면 한 해에 약 1500만원의 예산이 든다. 충청남도에선 비용을 아끼기 위해 보건기관들이 서로 협력하고 있다. 부혜숙 소장은 “새로운 의료 인력을 확보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근 보건소, 보건지소와 협력해 의료 및 행정 인력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방문 일정을 조정하고 함께 프로그램을 기획한다”고 귀띔했다.

전문가들은 지자체장의 의지와 정책 변화와 관계없는, 지속적인 ‘마을 주치의제’ 운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의료정책연구소 박윤형 소장은 “가정간호사(전문간호사)를 육성하는 것도 대안”이라고 조언했다. 박 소장은 “미국 등 선진국은 전문 간호사가 부족한 의료인력을 보충해, 의료 사각지대를 해소하고 있다”며 “전문성을 가진 가정간호사가 늘어나면, 보건소가 이들을 채용, 1차 보건의료 역시 지금보다 훨씬 탄탄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주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2호 창간 14주년 특집

지속가능한 공익 생태계와 함께 걸어온 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