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4일(수)

가난한 아이들에게 축구란… ‘목숨 살리는 운동’

남아프리카공화국
대부분 부모에게 에이즈 물려받아 가벼운 감기에도 쉽게 목숨 잃어
마약에 찌든 청소년들 거리 곳곳에서 배회…
꿈을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히 필요해
기아대책 후원으로 축구를 통해 정신·육체적 건강지켜

아프리카의 겨울은 추웠다. 얇은 바람막이 점퍼 하나를 믿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공항에 내리자마자 칼바람이 몰아쳤다. 영상 1도. 여름 샌들을 신은 발이 꽁꽁 얼기 시작했다. 쨍쨍 내리쬐는 태양과 찌는 듯한 더위를 생각했던 선입견이 또 깨지는 순간이다.

마중을 나온 기아대책 임흥세 기아봉사단원이 “아프리카의 겨울은 난방시설 없이 견뎌내야 해서 한국보다 더 지내기가 어렵다”고 웃었다.

“아프리카를 가난하고 못사는 무더운 곳이라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덥고, 춥고, 언어도 다양하고, 이곳도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공존하는 땅이지요.”

그의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아프리카를 한 달여 돌아보며 방대한 자원과 개발 기회, 중국과 인도의 공격적인 투자로 신흥 부자가 된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당장 먹을 것이 없고 치료할 약이 없어 죽어가는 생명도 많았다. 미래를 이끌어 갈 역동적인 힘과 암울한 현실이 공존하는 땅이다.

축구를 하며 한참을 뛰고 난 아이들은 아프리카의 추운 겨울과 에이즈의 공포를 잘 견뎌내고 있었다.
축구를 하며 한참을 뛰고 난 아이들은 아프리카의 추운 겨울과 에이즈의 공포를 잘 견뎌내고 있었다.

임흥세 봉사단원은 홍명보, 김주성, 하석주 선수 등을 키워 낸 축구 감독 출신이다. 이곳에서도 미래의 축구 꿈나무들을 키워내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에게 축구가 어떤 의미냐”고 묻자 그는 “생명을 살리는 축구”라고 답했다.

“축구를 잘하면 프로 선수가 되고 돈 잘 벌게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곳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한테서 에이즈를 물려받았어요. 잘 먹지도 못하는데 몸까지 허약해지면 가벼운 감기에도 쉽게 목숨을 잃습니다. 기아대책의 후원으로 아이들이 밥을 먹고 축구로 달리기를 하면서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그러니 ‘목숨 살리는 축구’라고 하는 겁니다.”

그의 ‘목숨 살리는 축구’는 2007년 처음 시작됐다. 케이프타운 인근의 도시 빈민이 모여 사는 카이처 지역에서 축구팀을 창단했다. 첫해 무려 700명이 축구를 하겠다며 찾아왔다. 본거지를 행정수도 프리토리아로 옮기면서 축구단은 더욱 커졌다. 현재 20여 아카데미를 운영 중이다.

기아대책이 운영하는 어린이개발센터(CDP)를 찾았다. 초·중등 아이 180명이 이 센터를 다닌다. 여자 아이들과 남자 아이들이 뒤섞여 공을 차고 있었다.

남지연 기아봉사단원은 “이곳 아이들은 13~14세만 되도 성관계를 갖고 아이를 갖는다”고 했다. 센터를 다니던 어린 여자 아이가 어느 날 부른 배를 안고 나타나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고 바쁘게 지켜주는 게 목표’가 됐다.

임 봉사단원은 “그래서 축구가 더욱 중요하다”고 했다.

“이곳에서 공부할 기회, 일할 기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배는 고프고 몸은 허약하니, 마을 곳곳에 마약에 찌든 멍한 눈빛을 한 청소년들이 배회합니다. 꿈을 가질 수 있는 무언가가 절실하지요.”

임 봉사단원에게 축구를 배우고 있는 큐웬(13)과 밀라노(12)를 만났다. 에이즈 환자인 큐웬과 밀라노는 얇은 체육복 바지에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열 살도 되지 않은 것처럼 작은 체구와 시린 겨울 맨발에 신은 낡은 운동화가 아이들의 현재를 보여줬다.

큐웬은 엄마, 아빠를 모두 잃고 이모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밀라노는 아빠를 에이즈로 잃고 엄마와 산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이들의 절반 정도가 에이즈로 부모 모두를 잃거나 한쪽을 잃었다.

밀라노는 “감독님 만나기 전에는 운동장에 나와 햇볕을 쬐며 친구들 뛰는 걸 보기만 했는데, 이젠 전반전은 너끈히 뛸 수 있다”고 자랑했다.

아이들이 살고 있는 집이 궁금해 밀라노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평 남짓한 방에 옷가지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양철 뚜껑으로 집 모양만 만들었을 뿐 바깥의 한기가 집 안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엄마 매들랜(37)씨는 “에이즈에 걸려 아이 뒷바라지를 못하고 있다”며 “아이가 꼭 축구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아대책과 함께 에이즈 아동들을 돕는 서클오프라이프의 책임자 캐런씨는 “이 아이들에게는 몸이 필요한 양식도 있어야 하지만, 마음이 먹고 살 꿈도 절실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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