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항공 여객기 참사에 마련된 ‘아동친화공간’
재난사회복지전문기관 더프라미스 “재난 약자 위한 ‘맞춤형 구호’ 필요해”
무안국제공항 2층 4번 게이트. 아기자기한 그림 옆으로 색연필로 쓴 듯한 ‘아이들과 함께 오세요’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이곳은 지난달 29일 벌어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로 공항에 머무르는 유가족 아동들을 위해 마련된 ‘아이돌봄 놀이쉼터’다. 1월 2일부터 운영을 시작한 이 쉼터는 보호자를 위한 휴식 공간과 함께 아동의 정서 안정을 위한 놀이 도구를 제공하며, 재난 속 돌봄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공간을 마련한 곳은 재난사회복지전문기관인 더프라미스(The Promise)다. 쉼터가 설치된 계기는 지난달 3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참사 발생 사흘째였던 이날, 더프라미스는 공항 내 유가족 중 아동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로 다음 날, 현장을 방문해 유가족과 소통하며 아동을 위한 쉼터의 필요성을 확인했다.
김동훈 더프라미스 상임이사는 “공항에는 이미 수많은 재난구호 부스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아동을 위한 부스는 단 하나도 없었다”며 “재난 현장에서 아동이 얼마나 돌봄의 사각지대에 있는지 다시금 실감했다”고 말했다.
◇ 재난현장의 약자, 아동을 위한 ‘친화공간’이 필요하다
쉼터를 위한 공간 확보는 쉽지 않았다. 참사 발생 직후 공항은 이미 200여 개의 재난구호 텐트로 가득 찬 상황이었다. 접근성이 좋은 실내 공간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했지만, 여유 공간이 없었다. 김 이사는 “한국중앙자원봉사센터, 전라남도자원봉사센터 등 여러 단체와 협의하며 공간 마련 방안을 논의했다”며 “결국 공항 측이 관광홍보코너를 내어주며 쉼터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공간이 확보되자마자 쉼터 준비 작업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놀이 도구와 학용품은 물론, 현수막과 안내판까지 제작되어 공항 곳곳에 배치됐다. 자원봉사센터에서는 간식을 지원했고, LG유플러스는 지난해 7월 맺은 업무협약에 따라 학용품이 담긴 아동 구호 상자를 제공했다.
2일부터 5일까지 운영된 기간 동안 더프라미스 사무국 직원 5명이 돌아가며 쉼터를 지켰고, 심리치료 전문가 7명이 투입되었다. 이곳을 찾은 아동은 누적 28명에 달했다. 부모가 참사 현장을 확인하거나 유류품을 수령하는 동안 아이들은 안전한 공간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돌봄 공간을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이라고 부른다. 낯설고 혼란스러운 재난 상황에서 아동을 보호하고 정서적 안정을 돕기 위한 공간이다. 단순한 놀이방을 넘어 아동이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부정적 영향을 차단하거나 2차 피해 요소를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더프라미스는 2007년 국제구호 협력기구로 출발해 국내외 재난 현장에서 아동돌봄쉼터를 운영해왔다. 2022년 동해안 산불 당시 대피소에서 아동 놀이방을 운영했으며, 2023년에는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을 비롯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현장 등에서도 아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 빠른 초기 대응, 민관 협력이 핵심
더프라미스의 목표는 재난 상황에서 아동·노인·장애인·외국인 등 구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약자를 위한 맞춤형 돌봄 서비스를 도입하는 것이다. 특히 아동의 경우, 기존 구호 서비스가 성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탓에 관련 시설의 필요성을 설득하는 과정부터 거쳐야 한다.
무안국제공항에 ‘아이돌봄 놀이쉼터’를 설치하기 전, 더프라미스는 가장 먼저 아동친화공간을 사용할 아동이 실제로 현장에 있는지부터 조사했다. 현장에 있는 민간기관에 연락해 아동의 존재 여부를 확인했지만, 답변이 ‘있다’와 ‘없다’로 반반 갈렸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오유현 더프라미스 재난심리지원단장은 “아동 돌봄은 돌봄 필요성을 인식한 사람에게만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쉼터가 마련되고 나면 실제 수요가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재난현장에서 아동친화공간의 가장 큰 과제는 인식의 전환이다. 돌봄 서비스가 필수적이라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재 행정안전부가 매년 발표하는 ‘재해구호계획 수립지침’에도 “구호약자를 위한 별도의 휴식·놀이 공간 등을 설치”하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지만, 이는 지침에 그칠 뿐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프라미스는 재난 현장에서 민간기관의 역할을 ‘빠른 초기 대응’이라 짚는다. 정부와 지자체의 경우 수요 확인과 절차에 따라 속도를 낼 수 없는 상황이 있으니, 민간이 먼저 진입해 빠르게 대처한 후에 공공기관에 위임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안국제공항의 ‘아이돌봄 놀이쉼터’는 6일부터 무안군 가족센터가 인계받아 운영한다. 이곳은 아동을 동반한 유가족뿐 아니라, 합동분향소를 찾는 조문객의 돌봄 수요까지 지원할 예정이다. 김동훈 이사는 “재난 현장에서 아동친화공간이 더 이상 특별한 일이 아닌, 당연한 지원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규리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