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 그 후] 포항제철소 침수 3개월의 기록
포스코, 수해 당시 고객사 473곳 전수조사
사고 초기 대응책 마련해 연쇄피해 최소화
“기업의 사회적책임 영역 넓힌 사례 평가”
‘철강재’는 거의 모든 산업군에 쓰이는 필수 소재다. 지난 9월 6일 한반도 남동부를 강타한 제11호 태풍 ‘힌남노’로 포항제철소가 물에 잠기자 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철강재가 제때 공급되지 않을 경우 건설·자동차·조선업 등 다른 산업군 연쇄 충격이 불가피했다. 정부는 이번 수해로 포스코가 2조원가량 매출 피해를 볼 것이라고 전망했다.
포스코는 곧바로 제철소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동시에 포항제철소 생산 물량을 납품받는 고객사 473곳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진행했다. 납기 지연으로 문제가 발생할만한 81곳은 직접 방문해 의견을 듣고 일일이 대응책을 내놨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보는 기업이 공급망에 있는 기업들의 손실까지 찾아내 해결한 사례는 글로벌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문가들은 포스코의 이번 대응이 재난이 빈번해진 시대 ‘기업의 사회적책임’에 대한 영역을 넓힌 의미 있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공급망 내 피해 기업 찾아내 대응책 마련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죠. 수출해야 할 물량은 밀려 있는데 핵심 소재를 납품해주던 포항제철소가 물에 잠겨 멈춰버렸으니까요.”
지난달 22일 만난 박동석 산일전기 대표는 석 달 전 힌남노가 포항을 덮친 당시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경기 안산 시화공단에 위치한 산일전기는 태양광·풍력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특수 변압기를 만드는 기업이다.
변압기 생산에 꼭 필요한 ‘전기 강판’을 공급해주던 포항제철소가 수해를 입으면서 이곳에서도 긴급 대책 회의가 열렸다. 납품이 지연될 경우 수십 년간 고객사와 쌓아온 신뢰 관계가 깨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자연재해로 발생한 일이라 포스코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포스코도 큰 피해를 당한 상황이라 차마 바로 연락해볼 수가 없었어요. 일주일 만에 포항에 연락했더니 담당자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때 정말 감동했습니다.”
변압기 생산의 필수 소재인 전기 강판은 규소(Si) 1~5%가 들어간 특수 소재다. 전력 손실이 작고 자기장을 발생시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전기자동차의 전동기, 태양광·풍력발전기 등에 주로 쓰인다. 국내에서 전기 강판을 생산하는 곳은 포스코가 유일하다. 박 대표는 “전기 강판을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한국, 일본, 독일, 중국 정도라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다”며 “소재를 구하지 못하면 수주 물량을 포기하거나 유럽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수입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엄청난 적자를 떠안을 수도 있다”고 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전기 강판은 포항에서만 만들 수 있는 특수 소재라 광양제철소를 통해 전환 생산하는 것도 불가능했다”면서 “수출하기로 돼 있던 물량을 내수용으로 돌려 산일전기에 먼저 납품했고, 전기 강판을 품질 손상 없이 건조할 방법도 찾아내 알려줬다”고 했다. 박동석 대표는 “사실 포스코가 전기 강판을 바로 수출하면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는데, 고객사를 포함해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큰 결정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건설 업계도 비상이었다. 서영산업은 경기 평택에서 건설 중인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케이블트레이’를 납품하는 업체다. 케이블트레이는 건물에 깔리는 전기 케이블의 훼손을 막는 필수 제품이다. 권오섭 서영산업 대표는 “케이블트레이를 제조하려면 포항에서 생산하는 ‘포스맥’이라는 소재가 꼭 필요했다”면서 “수해로 반도체 공장 건설까지 지연될 위기였다”고 했다.
포스코는 포항에서 생산하던 포스맥을 광양제철소에서 전환 생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전환 과정에서 소재와 색상에 약간의 변경이 발생했다. 서영산업이 예전처럼 납품을 하려면 발주처와 감리사에서 사용 승인을 다시 받아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포스코의 마케팅 부문과 연구소 등이 총동원됐다.
연구소에서는 광양제철소에서 대체 생산한 제품을 수차례 테스트한 뒤 내구성 등을 보증하는 품질보증서를 발행했다. 마케팅 부문에서는 품질 보증 범위를 조율하고 발주처를 설득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권 대표는 “한동안 잠을 못 잘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지만, 다행히 지난달 승인이 나서 예정대로 공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전환 생산이 어려운 소재의 경우, 포스코 해외 법인을 통해 수급 문제를 해결했다. 글로벌 자동차 기업에 부품을 납품하는 부산의 스테인리스 가공 업체 코리녹스도 중국·태국·베트남에 있는 포스코 해외 법인의 대체 생산 물량으로 납품 지연 위기를 넘겼다.
고객사·자매마을 “제철소 돕자” 지원 나서
물에 잠겼던 포항제철소에서는 석 달째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재난 발생 직후 업계에서는 포항제철소 복구 기간을 6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내다보기도 했다. 포스코는 정상화 시기를 앞당겨 이달까지 압연 공장 18곳 중 15곳을 가동해 연내 모든 종류의 제품을 생산할 계획이다. 압연 공장은 용광로(고로)의 쇳물로 만든 철강 반제품에 열과 압력을 가해 용도에 맞게 철을 가공하는 곳이다. 압연 라인이 복구된다는 건 정상적으로 완제품 생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복구 작업에는 그룹 임직원을 포함해 민·관·군 등 누적 100만명 이상이 동참했다. 이번 태풍으로 제철소에 유입된 흙탕물은 약 620만t. 서울 여의도 지역을 2.1m 높이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규모다. 지하부터 지상까지 차오른 물을 공장 밖으로 빼내는 ‘배수 작업’이 가장 먼저 진행됐다. 소방청은 소방차 41대와 소방 펌프 224대를 투입했다. 울산 119화학구조센터에서 보유한 대용량포 방사 시스템 2대도 포항제철소에 배치했다. 국내에 단 2대뿐인 대용량포 방사 시스템은 분당 최대 7만5000L의 물을 배출할 수 있는 첨단 장비로 제철소 주요 침수 지역의 배수 작업 속도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객사의 지원도 잇따랐다. 수해 직후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국내 조선 3사는 포항 복구 현장으로 수중 펌프 53대, 발전기 4대, 고압 세척기 2대, 기타 장비 41대 등 복구 장비 총 100대를 보냈다. 포스코 관계자는 “침수된 공장들의 조기 복구를 위해서는 펌프가 가장 절실했고, 펌프 동력을 위한 발전기도 꼭 필요했던 상황에 지원받을 수 있어 제철소를 조기에 정상화하는 데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포스코가 보유하고 있던 ‘인장 시험기’ 8대도 이번 수해로 모두 침수됐다. 인장 시험기는 제품 재질을 테스트하는 기계로, 국내에 이 기계를 정비할 수 있는 전문 엔지니어는 단 한 명뿐이라 연간 스케줄이 이미 꽉 찬 상황이었다. 소식을 들은 동국제강은 자사의 인장 시험기 수리를 미루고 포항제철소에 엔지니어를 양보했다. 동국제강은 “큰 피해를 본 포항제철소를 돕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배수 작업이 완료된 뒤 ‘설비 건조 작업’이 이뤄졌다. 물에 닿은 설비를 말리기 위해 인근 농가에서는 ‘고추 건조기’까지 지원했다. 수해 초반 정전으로 작업이 어려운 상황에서 펌프와 조명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임직원과 협력사 직원들이 타고 다니던 전기자동차까지 동원됐다. 포항, 광양, 평택 등 포스코 자매 마을 주민들은 직접 빚은 송편, 햅쌀, 생수 등 각종 식음료를 제철소로 보내왔다. 포항 남구 대이동 상인회, 죽도시장 수산상인회 등 지역민들도 제철소 복구 작업 지원을 위해 식사와 부식을 지원했다.
추석을 앞두고 수해를 입은 제철소 직원들을 위해 경기 평택 월곡 1동 주민들은 직접 빚은 송편 600인분과 쌀 300㎏을 전달했다. 마을 대표인 김진성 통장은 “포항제철소 피해 소식을 듣고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기 위해 직접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전남 광양 본정마을에서는 추수한 햅쌀과 라면, 생수 등을 트럭에 실어 보냈다. 본정마을 이장 고동석씨는 “마을에 태풍 피해가 발생하거나 매년 매실, 감 등 과실 수확 철이 되면 포스코에서 제일 먼저 일손을 지원해줬다”면서 “하루빨리 복구되길 우리 마을 사람들이 모두 기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