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앞선 자 뒤서고, 뒤선 자 앞선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지난 10여 년, 공정무역 커피 비즈니스 덕에 나름 개성 있는 커피 생산지를 경험해 왔다. 스페셜티 커피처럼 맛있는 커피만을 찾아 여기저기 다닌 것이 아니다 보니, 한 산지에 긴 시간 머물면서 여러 가지 렌즈로 그 사회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 렌즈의 이름은 젠더, 인류학, 경제학, 비즈니스, 사회혁신 등 다양하다. 이 중에서도 나를 가장 매혹했던 관점은 ‘다이내믹스(dynamics·사물 간의 변화를 주는 힘의 작용)’다. 어떻게 변화가 찾아올까, 무엇이 변화를 견인하는가.

최근 흥미 있게 본 생산지는 코스타리카 커피 섹터다. 스위스와 마찬가지로 영세중립국으로 선언한 이 나라에는 유엔 부설 대학원 대학인 유엔평화대학이 있다. 또 생태적으로 잘 보전된 지역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발전했다. 일찍이 재생에너지를 적극적으로 개발해, 공급 가능한 에너지의 90%가 신재생에너지라 한다. 이것을 기반으로 세계 최초 ‘탄소중립 커피’를 생산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런 기후위기의 시대에 앞선 자가 걸어온 길이 궁금하다.

코스타리카는 중미의 인구 500만 국가로 식민지 시대부터 커피, 바나나 등의 단일 작물 경작과 수출을 주된 경제활동으로 영위했다. 토착 원주민의 숫자가 작아 스페인 본국에는 무의미했던 땅이었지만, 원주민과 영토분쟁 없이 커피 재배 면적을 확대할 수 있었기에 인접 주변국보다 50년 이상 빠르게 커피 비즈니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국가 내 커피재배 확산 과정도 다양하다. 초창기 작은 길을 놓고 비즈니스를 시작한 따라주 지역은 소농 기반의 소규모 경작과 가공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후 대서양 철도와 판아메리칸 하이웨이로 연결된 뚜리알바, 뻬레스 셀레동 지역은 대규모 경작을 할 수 있어 기반 시설과 생산량의 규모가 다르다. 커피는 중남미의 소국 코스타리카에 풍요를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발전의 양상이 어떻든 단일작물에 기댄 코스타리카 경제는 국제 원자재 가격변동에 취약하고, 이것을 가격변동을 촉발하는 기후변화, 병충해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런 취약성은 내부적으로 불평등한 토지 분배와 계층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할 종속관계가 돼 대서양 해안가로 끝도 없는 열대 과일 농장을 건설했다. 이 농장을 따라 철길이 건설되고 바나나와 파인애플은 미국의 아침 밥상에 오르게 된다. 온두라스와 함께 ‘바나나 리퍼블릭’이란 서글픈 별명으로 한 시대를 지내기도 했다. 커피도 잘 되긴 했지만, 생산량으로는 브라질과 베트남을 이길 수 없었고, 품질로는 콜롬비아를 따를 수 없었다. 브라질에서 1센트라도 낮춰 국제시장에 덤핑을 치면, 코스타리카 농촌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1960년대에는 국제 농식품 기업들이 코스타리카의 태평양 연안 저지대에서 소 목축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규모 재정지원을 결정했다. 그 결과 코스타리카 대규모 산림이 남벌되고, 황폐화됐으면 연간 삼림 황폐화율은 4%에 이르게 됐다.

다행히 1970년대 들어서면서, 코스타리카의 유일한 먹고 살 거리인 환경자원이 남용되는 것을 본 시민과 국가가 나서기 시작했다. 국립공원 시스템을 갖추고, 생태관광을 발전시켰다. 1990년대 공정여행, 에코투어리즘의 시발지가 됐다. 2000년대 들어서는 ‘단일작물 플랜테이션이라 어쩔 수 없다’가 아니고, 그 안에서 탄소를 줄일 수 있는 경작법과 커피 가공법을 발전시키고, 이를 받아들이는 농민들에게 적극적인 보조금 혜택을 줬다. 에너지 효율이 높아 탄소저감에 효과가 있는 기계로 바꾼다면, 이를 위한 투자금 10%를 농가에 현금 인센티브로 제공했고, 농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 재원은 한국으로 치면 코이카와 같은 독일의 국제협력공사(GIZ)가 지원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가공법에 ‘허니 프로세스’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 커피의 물량과 품질로 승부하는 다른 생산지와 적극적인 차별화를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코스타리카는 인접 국가보다 먼저 커피 비즈니스를 시작했지만, 환경적 요인으로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최근에는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 위기 앞에 다시 한번 국가적인 생태시스템 구축이라는 반전을 이뤘다. 이제 기후위기 시대에 ‘탄소저감커피’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코스타리카 커피 농가의 끈질김이 존경스럽다. 물론 잔혹한 경쟁의 세계에서 자기를 차별화하려는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 방향이 모두에게 대안이 된다는 것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이 귀한 커피가 국내 공정무역단체를 통해 곧 소개된다고 하니 사뭇 기대가 크다.

선진국에 산다는 우리는 힘들게 재배된 커피를 즐기면서도 ‘나 하나쯤이야’하면서 쉽게 매장의 일회용 컵, 신선 로스팅을 위한 매주 택배 주문에 거리낌이 없다. 생산국의 앞선 자들이 애써 줄여 놓은 탄소발자국을 계속 만들어 내는 형상이다. 이 가을, 커피 한잔이 생각나는 계절. 생산지 농민들이 던져주는 이어달리기 바통을 잘 이어받아, 뒤선 자도 앞서게 하는 탄소저감 커피 한 잔을 실천해 보자. 이것이 커피의 미래여야 한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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