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사회적기업 인증 따드려요” 창업자 유혹하는 불법 브로커

[공익 추적] ‘사회적기업 브로커’ 활개

자료사진 ⓒ더나은미래

“우리가 낸 세금 돌려받는 겁니다. 당당해지세요.”

지난 18일 서울의 한 카페. 사회적경제 창업을 주제로 강의에 나선 A씨가 수강생들에게 “당당히 지원금 받아 챙기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A씨는 이른바 ‘사회적기업 브로커’로 불리는 인물이다. 사회적기업으로 인증받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일반 창업자들을 유혹한 뒤, 정부 지원금을 탈 수 있는 다양한 편법을 알려주겠다며 컨설팅비와 대행비 명목으로 돈을 받아 챙긴다. 이날도 A씨는 “예비 사회적기업만 돼도 차 한 대 뽑을 수 있다. 카니발이 영업용이라고 둘러대기 좋다”며 국민 혈세로 만들어진 지원금을 유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아이템 없어도 만들어 드립니다”

사회적기업 브로커들이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어지럽히고 있다. 사회적경제란 수익을 내면서 동시에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경제활동으로, 사회적기업·소셜벤처·사회적협동조합·마을기업 등이 사회적경제 주체에 해당한다. 정부나 지자체는 각종 사회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이 사회적경제 조직들에 지원금, 세제 감면 등 다양한 혜택을 준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투자·융자 상품도 따로 마련돼 있다.

브로커들은 이런 혜택을 미끼로 창업자들을 끌어들인다. 수법은 간단하다. 우선 유튜브나 블로그, 페이스북 등에 ‘공짜 창업’을 내건 홍보 영상이나 광고 글을 올린다. ‘나랏돈 2000만원 지원받은 후기’ ‘사회적경제 지원금 활용해 무료로 창업하기’ 등의 자극적인 제목으로 눈길을 끈다. 사회적경제 조직 대상 정부 지원금은 ‘눈먼 돈’이나 마찬가지라며 지원받는 팁을 알려주겠다는 내용이다.

브로커들은 ‘사회적기업 인증 대행·컨설팅’을 해주겠다며 온라인상에 연락처를 공개한다. 기자가 브로커들에게 전화를 걸어 컨설팅 비용을 문의한 결과, 최소 100만원부터 많게는 1000만원을 요구했다. 이날 기자가 지켜본 설명회도 “사회적경제 지원금을 창업에 써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참석했다”는 창업 준비생 몇 명이 자리했다. A씨는 “술·담배·성매매만 빼면 어떤 종류 사업도 가능합니다. 사회적경제를 사업 보조바퀴로 삼아 제발 돈에 미련 없이 사업하시길 바랍니다”라며 수강생들을 격려(?)했고, 이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A씨가 불러주는 ‘팁’을 받아 적었다.

브로커 손에 공인중개사무소, 헬스장이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둔갑

A씨 외에도 전국적으로 수십 명의 브로커가 활동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대부분이 같은 수법을 쓴다. “인증 따드려요”나 “사회적경제로 창업하세요”라는 애매한 말로 창업자를 유혹하곤, 개별 상담이 시작되면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말을 바꾸는 식이다. 사회적기업은 정부나 지자체의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인증’ 절차가 있는데 혜택이 좋은 만큼 절차가 까다롭다. 사실상 브로커의 컨설팅이나 대행으로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는 건 불가능하다. 브로커들은 비교적 설립이 쉬운 사회적협동조합 설립이나 예비 사회적기업 지정 쪽으로 유도한다. 정부에서 사회적경제 창업자에게 제공하는 ‘무상 컨설팅’ 제도가 있지만, 브로커들은 “무상 컨설팅은 전혀 쓸모가 없다”며 속여 컨설팅비를 받는다.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경제 조직을 육성하기 위해 마련한 국민 혈세가 취지와 다르게 엉뚱한 곳으로 샌다는 것이다. 취재 결과 일반 공인중개사무소와 엔터테인먼트 회사, 헬스장 등이 브로커들의 손에 의해 사회적경제 조직으로 꾸며져 법인세 감면 혜택을 받고 있었다.

피해는 고스란히 선량한 사회적경제 조직에 돌아간다. 정작 지원을 받아야 할 곳이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브로커들을 걸러내기 위한 불필요한 행정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도 문제다. 정부와 중간지원조직 관계자들은 “브로커의 존재는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말한다. 최인남 전라북도경제통상진흥원 사회적기업가육성팀장은 “관계 기관들은 서류 검토를 강화하고 사업장 방문 평가를 실시하거나 심층 면접을 추가하는 식으로 검증 제도를 보완하고 있다”며 “이들을 걸러내느라 담당 직원 고생이 말도 못한다”며 하소연을 했다. 이렇게 절차가 복잡해지며 늘어나는 물적·인적 비용도 결국 세금에서 나온다.

사회적 가치나 사회문제 해결에 전혀 관심 없는 ‘가짜 사회적경제 조직’이 늘어나면서 영업 실적과 매출 등 전체 사회적경제 지표를 악화시키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브로커들이 “어차피 다른 곳도 다 페이퍼컴퍼니”라는 말을 퍼뜨리고 다니는 탓에 생태계의 이미지도 나빠지고 있다.

날로 진화하는 브로커들… 엄중한 처벌 필요해

브로커들의 수법은 점점 진화하고 있다. 업체와 짜고 엉터리 홍보물을 만들어 사회적경제 조직에 주는 인건비·홍보비 지원금을 타내기도 하고, 자격이 안 되는 창업자를 통과시키기 위해 담당 직원에게 생떼를 부리거나 그마저 안 통하면 거짓 민원을 넣는다. 담당 직원이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눈치가 보이면 “직원이 갑질을 한다”는 식의 민원을 넣어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을 처벌할 순 없을까. 이희숙 동천 변호사는 “편법으로 지원을 받아낸 증거가 명백하다면 처벌할 수 있다”고 답했다. 법조계에 따르면 실제로는 받기 어려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속여 컨설팅 비용을 받았다면 사기죄, 금전적·제도적 혜택을 취지와 다르게 유용한 경우 횡령이나 공무집행방해죄가 될 수 있다. 이 밖에도 협동조합기본법(제117조), 사회적기업 육성법(제23조),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제40조·41조) 등에 대한 위반 소지가 크다.

문제는 위법성을 증명할 증거를 찾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행정 대행 자체가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컨설팅과 행정 대행을 전면 금지할 수도 없고, 브로커와 창업자 사이에 오간 대화 내용을 수집할 수가 없어 혐의를 특정하기 어렵다. 행정사·법무사 등 전문가가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는 경우도 있다. 사회적경제 인증·지원과 관련된 관계자들조차 이 문제를 공론화하길 꺼린다는 것도 문제다. 자칫하면 사회적경제 전체가 매도당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브로커들에 대한 엄중 처벌이 필요하지만 제도를 복잡하게 만드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복잡한 행정 절차는 오히려 브로커들이 활개 치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양동수 사회혁신기업 더함 대표(변호사)는 “명백한 위법 행위를 적발해 엄중히 처벌하고, 지원받은 기업들이 꾸준히 사회에 기여하는지를 모니터링하는 민관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선하 더나은미래 기자 son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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