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독립유공자 후손 김화석씨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에 저희 할아버님은 50대였어요. 독립운동 하기엔 나이가 많았지만, 한참 어린 청년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셨어요. 하기야, 나라 구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입니까.”
지난 14일 경북 안동에서 3·1운동 독립유공자인 김계한(1867~1956) 선생의 손자 김화석(92)씨를 만났다. 김계한 선생은 1919년 3월 18일 안동 읍내 장터에서 시작된 만세운동 주동자 중 한 사람이다. 장터에 모인 150여 명이 오전 11시경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후 군중이 가세해 오후 무렵에는 3000여 명이 군청과 경찰서 등 일제 기관 건물을 둘러쌌다. 김화석씨는 “안동의 독립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힘을 합쳐 주도했다”며 “안동교회 교인이었던 할아버님은 천도교 인사들과 긴밀히 연락하며 만세 운동을 준비하셨다”고 말했다.
김계한 선생은 1995년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손자인 김씨가 정부 기록보관소에서 직접 할아버지의 복역 기록을 찾아내 보훈처에 제출한 지 5년 만이었다. 김씨가 거실 한쪽에 놓인 낡은 나무 궤짝을 손으로 가리켰다. 할아버지의 유품을 보관한 곳이라고 했다. 두꺼운 자물쇠를 풀고 독립유공자 표창장을 꺼냈다.
“제가 열 살 때인가 할아버님이 들여온 궤짝이에요. 여기에 안경, 도장, 문서 같은 것들을 넣어두셨지요. 할아버님을 떠올리면 까만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독립운동 직후에 보안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6개월이나 옥고를 치르셨어요. 옥중에서 고초를 겪으며 한쪽 눈이 실명했는데, 제대로 치료를 못 받아 결국 안구를 들어내야 했어요. 그 뒤로 늘 시커먼 색안경을 쓰고 다니셨지요.”
한쪽 눈을 잃었어도 좌절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넘어갈 때까지 농사일을 하며 가족을 먹여 살렸다. 김씨는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아왔다”고 했다.
김씨는 현재 20여 년 전 지어진 단층 양옥에 살고 있다. 집 장사가 ‘날림’으로 지은 낡은 집이라 창호가 시원치 않아 겨울이면 외풍이 심했다. 독립유공자 후손 주거 환경 개선 사업을 진행 중인 LG하우시스는 지난해 김씨의 집을 찾아 창호와 바닥재를 새것으로 교체해줬다. 김씨는 “큰 선물을 받았다”며 “덕분에 올겨울을 따뜻하게 났다”며 웃었다. “창호랑 바닥을 갈면서 20년 넘은 오래된 싱크대도 전부 바꿔줬어요. 근처에 살면서 살림을 봐주는 며느리가 가장 좋아했습니다.”
독립유공자와 유족 단체인 광복회 회원인 김씨는 오는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로 바쁘다. 그는 “독립운동에 참여했지만 공적을 인정받지 못한 분이 많다”면서 “정부가 그들에게도 더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동= 한승희 더나은미래 기자 hee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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