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시력 장애인문제
빛과 색은 볼 수 있는데 ‘전맹’에만 맞춰진 제도 국내 정책 개선 시급해
“고령화 시대 접어들어 저시력 인구 더 늘 것”
“부실 공사야, 부실 공사.”
승객을 기다리던 백발 모범택시 기사가 검은 보도블록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갈라지고, 올라온 데 보이지? 거기서는 사람이 많이 넘어져요.”
서울역사 앞 버스환승센터 인근 도로. 노란색 칠이 벗겨진 점자블록(시각 장애인의 보행 안전을 위한 요철이 있는 바닥)이 검은 속살을 지저분하게 드러냈고, 지진이 난 듯 갈라져 올라온 곳도 있었다. 남대문을 넘어 서울시청 쪽으로 향하는 길 곳곳에도 노란 칠이 벗겨진 검은 점자블록을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서울시가 지난 2008년부터 ‘디자인 서울’ 사업으로 차별화된 거리를 만들면서 생긴 것이다. 도시 미관을 이유로, 노란색이어야 하는 시각 장애인용 점자블록을 개성 있는 색으로 꾸민 것이 시초. 시각 장애인들의 항의가 거세자 노란색을 덧칠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벗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역사 인근 보도를 비롯해, 명동이나 강남역 주변이 이런 블록이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다.
◇저시력 장애인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부터 시작
왜 이런 해프닝이 벌어졌을까. 미영순 한국저시력인연합회 회장은 “정책과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시각 장애인은 모두 시력이 아예 없는 ‘전맹(全盲)’뿐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국내 등록 시각 장애인 중 전맹 비율은 12%대에 지나지 않는다. “저시력 장애인들이 장애인으로 등록하기를 꺼리는 특성까지 고려하면 전맹 비율은 6% 정도로 떨어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맹학교 출신의 한 시각 장애인은 “시각 장애인 하면 아예 못 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실제로는 정말 다양하다”면서 “아예 안 보이는 사람은 드물고, 빛이나 색은 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저시력은 잘 보이는 쪽이 교정시력 0.2 이하이거나, 시야가 30도 이내로 좁은 상태를 말하며, 색맹과 색약 등도 포함된다.
◇변해가는 장애 유형 맞춰 제도 따라줘야
이는 국내 장애 정책이 변해가는 장애 유형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시력 장애는 대부분 후천적으로 발생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1년 장애인 실태조사’를 보면, 전체 시각 장애인 28만7500명 중 93.3%가 출생 이후에 장애를 안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원인은 대부분 질환(53.3%)과 사고(36.8%). 미영순 회장은 “고령에 따른 시력 손상도 저시력의 큰 원인 중 하나로, 이미 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만큼 저시력 인구는 더 늘어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저시력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미미하다. 2010년 기준, 등록된 저시력 장애인 25만명 중 보조기기 등을 지원받은 저시력인은 400명 정도에 불과하다.
미영순 회장은 “지자체에서 정책을 만들기 위해 시각 장애인 대표, 지체 장애인 대표, 노인 대표 등을 모으면, 시각 장애인 대표로는 항상 맹인(전맹)을 부른다”며 “그들은 아무래도 전맹인 처지를 대변하게 되니, 저시력인들은 자연스레 복지의 사각에 놓이는 것”이라고 전했다.
유명화 한국장애인재활협회 사무총장은 “힘이 있는 집단은 자체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그 집단을 대변해주는 목소리도 크다”며 “청각 장애, 시각 장애, 발달 장애, 내부 기관 장애 등 소수 장애에 대한 정책이 많지 않은 것은 그 목소리가 작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발적인 구제 의지가 부족하다는 것도 정책에서 소외되는 이유 중 하나다. 자폐 등 발달 장애 인구는 늘어나는데, 국내 장애 정책이 아직까지 지체 장애 위주로 구성된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다. 유명화 사무총장은 “2013년에 시행될 정부의 ‘장애인 정책 발전 제4차 5개년 계획’에서는 장애인 약자 부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