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3일(월)

아픈 마음 달래주는 상담원, 그들도 아프다

전화상담 36년… 현실은 역행
작년 ‘생명의전화’ 10만건 넘게 상담 10년 전 比 70% 늘어
상담원 처우는 제자리 대부분 봉사자에 의존
감정 이입해 대화하니 내담자의 고통 그대로 트라우마로 남아
상담자 후유증 치료와 전문적 교육과정 절실

“근데 남편은 왜 이혼을 안 해 줄까요?”

김선경 용문상담심리대학원 교수가 질문을 던졌다. “아이 때문 아닐까요?” “남자 심리상, 애 때문은 아닐 거예요” “이혼해야죠, 평생 이렇게 (맞으며) 살 텐데…”라는 전화상담 자원봉사자들의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잠시 후, 김 교수가 또 한 번 물었다. “그런데 이 내담자가 30분 이상 전화통화 한 후 받은 도움은 뭘까요?”

이날 상담사례를 발표했던 한현순(69)씨는 잠시 주저하더니 “쌓였던 얘기를 실컷 하고 마음이 좀 풀렸던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다른 참석자들도 “마음이 후련하겠죠” “내 편이 있다고 느끼죠”라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분의 삶이 고통스럽다는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죠. 상담의 주제를 아주 작게 줄이는 것, 그래서 구체적인 방법이 나오게 하는 것이 전화상담의 키포인트예요.”

지난 3월 29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 위치한 사랑의전화 상담센터 ‘카운셀24’ 1층 회의실에 상담 자원봉사자 5명이 모였다. 이 세미나는 상담 자원봉사자들이 서로 상담사례를 공유하고, 상담 과정에서 겪는 애로점을 전문가들로부터 조언받는 자리다. 3년차 자원봉사자 김봉연(가명·56)씨는 “봉사 초기에는 너무 황당한 사연이 잦아 힘들었는데, 이런 자리를 통해 가짜 사연으로 장난전화를 일삼는 내담자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고 했다.

 전화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 70% 넘게 늘었다. 전화상담은 익명으로 자신의 문제를 노출하기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정서상 잘 맞는다고 한다. 하지만 전화상담 자원봉사자들은 남모르는 고통을 안고 있다. /사랑의전화 제공

전화상담을 원하는 사람들은 10년 전에 비해 70% 넘게 늘었다. 전화상담은 익명으로 자신의 문제를 노출하기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정서상 잘 맞는다고 한다. 하지만 전화상담 자원봉사자들은 남모르는 고통을 안고 있다. /사랑의전화 제공

◇”자원봉사자 없으면 운영 못해”… 국내 전화상담 현실

1976년 국내에 처음 도입된 전화상담 역사는 40년이 다 되어간다. 한국생명의전화(1588-9191)를 시작으로 사랑의전화(1566-2525), 한국여성의전화(02-2263-6464) 등 민간단체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이제는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1577-0199), 보건복지콜센터(129), 한국청소년상담원(1388) 등을 운영하고 있다.

전화상담의 수요는 갈수록 늘고 있다. 지난해 한국생명의전화에 걸려온 상담전화 수는 전국적으로 10만건이 넘는다. 10년 전인 6만8000건에 비해 70% 정도 늘어난 수치다. 전화상담은 익명으로 자신의 문제를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정서에 잘 맞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24시간 운영되는 전화상담의 특성상, 대부분 자원봉사자나 비정규직 형태의 상담원으로 꾸려가고 있다.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상담 기본교육을 마친 자원봉사자들이 직접 수화기를 들고 내담자를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선경 교수는 “상담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서 교육학과·사회복지학과·심리학과·아동복지학과·가정학과 등 많은 대학에서 상담 관련 전공을 개설하고, 관련 자격증도 넘쳐나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환경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사랑의전화 이수빈 연구원은 “상담은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분야인데, 상담 관련 석·박사를 따도 이들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은 편”이라며 “상담 수요는 늘고 예산은 제자리이니, 자원봉사에 의지하는 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미상_사진_전화상담_상담원_2012◇상담봉사자들, “우리도 상담이 필요해”

하지만 전화상담 자원봉사자들의 경우 상담 후유증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자살 충동이나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내담자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이다. 1980년부터 자원봉사를 해온 박주선(57)씨는 “초창기에는 너무 힘든 내용을 들으면 생각이 떨쳐지지 않아 몇 달간 같이 아팠다”라며 “그걸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포기한다”고 덧붙였다. 22년차인 한현순씨는 “자살상담을 하고 오면 집에 와서도 ‘내가 과연 자살을 막았는가’ 하는 걱정이 맴돌아 막 글을 쓰거나 낙서하면서 푸는 버릇이 생겼다”고 말했다.

이뿐 아니다. 상담 내용이 점점 다양해지면서 역량에 한계를 느끼기도 한다. 60대인 자원봉사자들이 10~20대 젊은 세대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다는 것. 현순씨는 “예전에는 경청하고 공감하는 수준으로도 보람 있는 상담이 됐지만 요즘은 다르다”며 “시어머니가 침실을 자꾸 노크한다고 이혼하겠다는 20대 부부, 중2짜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놓고 전화하는 사례 등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니까 이 세대를 이해할 별도 재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상습반복전화나 장난전화, 음란전화와 같은 것들도 상담원들을 지치게 한다. 사랑의전화 이 연구원은 “같은 문제로 습관적인 반복 전화를 한다거나, 무턱대고 욕설이나 외설적인 농담을 하는 경우, 술만 마시면 전화해서 주정을 부리는 사례들은 자원봉사자 분들의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들”이라고 했다.

한 자원봉사자는 “하루에 한 통도 제대로 된 상담전화를 못 받는 경우도 많다”고 털어놓으며 “좋은 의도로 자원봉사를 하는데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제 막 상담봉사자 교육 3주차에 접어든 조은정(29)씨는 “처음 자살상담봉사자가 되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힘든 얘기를 계속 들으면 나쁜 영향을 받는다며 반대가 심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중도에 포기하는 자원봉사자들도 많다. 사랑의전화의 경우, 자원봉사 자격을 부여받는 교육이수자가 총 2456명인데 비해, 최근 3개월간 활동하는 봉사자는 75명에 그치고 있다.

◇상담자원봉사자의 보람과 자긍심 키워줘야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상담자들에게 전문가의 심리치료를 받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관련단체의 예산이 부족해 자원봉사자들이 이런 기회를 갖기 어렵다. 한 자원봉사자는 “교육은커녕, 사례집도 제대로 구하기 어려워 자비로 전문 서적을 사서 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랑의전화 이 연구원은 “감정이입을 통해 트라우마가 생길 경우 자기분석 상담을 받거나, 반복전화에 응대하다 지치는 경우 상담의 명료화 기법을 배워야 한다”며 “하지만 좋은 강사를 초빙해 자원봉사자 교육을 하려면 많은 예산이 필요하기 때문에 교육 기회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국가에서 핫라인 상담전화를 개설하면서 들인 예산의 일부만이라도,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민간단체나 기관이 효율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훨씬 효율적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생명의전화 하상훈 원장은 “대개 여러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다 결국 심화되어 자살까지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상담문화가 형성되는 게 우리 사회의 면역력을 키워주고 자살 예방에 효과적”이라며 “전화상담 자원봉사자를 위한 재교육 프로그램이나 소그룹 활동 등을 지원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자살률 1위 국가의 뒷골목을 지키며, 오늘도 전화기를 붙잡고 한 생명을 구하느라 분주한 자원봉사자들. “고충보단 보람이 크다”라는 말을 강조하지만, 이들의 봉사정신과 보람을 자긍심으로 이끌 수 있는 환경 개선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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