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고대권의 Écrire(에크리)] ‘사람’이라는 두 글자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며칠 전, 어떤 선생님으로부터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에 대한 해석을 들었습니다.

연탄이 비록 그 열기를 모두 세상에 내주었다고 하더라도 연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해석이었습니다. 어떤 존재가 쓸모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선생님의 말씀처럼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라는 문장은 연탄재가 쓸모 있다고 설득하고 있지 않습니다. 쓸모가 없어졌다 해서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서는 안 된다는, 윤리의 밑바닥을 응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연탄을 ‘사람’으로 바꾼다면 더 표현이 정확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그 쓸모가 다했다고 해서, 혹은 앞으로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든 정당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은, 그저 그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 다른 수식어는 불필요합니다.

‘불쌍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가능성이 있는’ 사람, ‘안타까운’ 사람, ‘친한’ 사람, ‘힘 있는’ 사람…. 사람 앞에 붙을 수 있는 수식어는 무한정하지만 수식어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거드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존재 자체는 아닙니다.

고맙게도 정현종 시인은 ‘사람’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를 통해 사람이 온다는 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부서지기 쉽고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람은 그의 일생이며 마음입니다. 이것은 경건한 사실입니다.

‘더나은미래’에 기사를 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아름다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만한 사람, 비겁한 사람, 천박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즐거운 것처럼 보였는데 불행한 사람도 있었고,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빴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고, 사실은 저도 그들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앞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을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의 흐름 속에서 그것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받을 수 있는 모든 것들에서 저 역시 비켜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더나은미래’에 기사를 쓰며 배운 것이 있다면 사람을 좀 더 사람처럼 대할 수 있는 마음과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용서하고 벌하고 나누고 빼앗기 전에 ‘사람’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나은미래’와 함께 고마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마흔 번째 ‘더나은미래’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보이고 이만 작별 인사를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이들의 건강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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