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에 괴로워하던 아이가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연이 보도되고 곧이어 학교폭력을 멈추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선생님에게, 부모에게, 또래들에게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묻습니다. 전문가들은 분석을 하고 정부와 언론은 학교 폭력을 근절할 대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가끔 학교폭력 가해학생, 피해학생, 주위학생들과 인터뷰를 한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왜 때리느냐, 맞았을 때 기분이 어땠냐, 왜 방관했느냐 라고 기자는 질문을 하고 학생들은 “그냥” “기분 나빠서” “모르겠다”는 식으로 답을 합니다.
이런 기사를 보고 있자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갑니다. 아이들이 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와 사회가 던지는 질문이 본질을 피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가해학생, 피해학생, 주위학생으로 구분하는 것은 마치 가해학생, 피해학생, 주위학생이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효과를 냅니다.
하지만 학교 폭력에 관한 진실은 어떤 아이라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방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폭력은 아이들의 세계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관습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아이들의 낮은 자아존중감입니다. 폭력은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성세대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아이들을 다른 아이들에게 얻어맞지 않는 아이, 다른 아이를 때리지 않는 아이로 키워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다른 사람을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주위에 있는 약자를 배려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고 서로 간에 호혜적인 관계를 통해 공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아이로 키워내는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은 쉽게 폭력에 물들지 않고 폭력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폭력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분노의 에너지는 우리의 아이들을 ‘선한 아이들’로 키워내야 한다는 성찰과 행동의 에너지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이들에게 향하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지 않으면 아이들은 자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래서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에게 선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도록 유도할 수 있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나눔입니다.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이고 작은 나눔이라도 아이들이 동참하게 한다면 아이들은 조금씩 변할 것입니다.
애초에 ‘윤리학ethics’은 ‘관습ethos’에 관한 학문입니다. 폭력의 윤리도 선함의 윤리도 우리의 관습 속에서 등장합니다. 나눔의 실천과 나눔의 정신이 관습처럼 자리 잡을 때, 공동체는 선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