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눔’으로 일어선 나라다. 국무조정실 개발협력정책관실에 따르면 한국은 해방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약 120억달러(현재 약 70조원)의 공적개발원조(ODA)를 받았으며 특히 1946~1980년까지 미국의 가장 많은 원조를 받은 나라 중 하나다.
글로벌 보건의료 NGO인 메디피스의 신상문 사무총장은 “국내 최초의 근대식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많은 시설과 사회 제도들이 자선 활동과 관련이 있다”면서 “특히 전후 해외 원조 단체들은 아동 양육 시설에 있어서 우리나라 전체 재원 중 50%가 넘는 비용을 부담했는데 이는 초기 사회복지제도에 상상력을 부여했고 아동 보호 시설, 복지관 같은 좋은 모델을 가져다주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한국은 나눔 위에 세워진 나라
외국인들의 나눔에 의해 세워진 대표적 케이스가 병원이다. 대한의사학회에 따르면, 1885년 9월 10일 선교 의료인 스크랜튼이 서울 정동에 진료소를 시작하면서 민간병원 형태의 최초 의료기관인 ‘시병원’이 등장했다. 왕립병원인 광혜원이 주로 관리나 양반계층의 진료를 하였다면 이 병원에서는 주로 가난한 서민층의 환자들이 많았다. 국내 최초 서양식 의료기관인 세브란스병원 또한 미국 선교사 알렌이 주도해 세워졌다. 1885년 알렌의 주도하에 왕립병원인 광혜원이 세워졌고 이후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회에서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가 기부한 기금으로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한성도동에서 세브란스병원으로 명칭을 바꿔 개원한 것.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도 1899년 10월에 미국의 기독교 북장로회의 대한선교회유지재단에서 대구 동산기독병원으로 설립됐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의료원부속병원은 1945년 4월에 동대문부인병원을 인수하여 개원하였지만 그 최초의 기원은 메타 하워드가 1887년 이화학당에서 부인병원을 시작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국내 자선가에 의해 세워진 병원도 있다. 대표적으로 부산 고신대 복음병원이 있다. 평양도립병원장을 지내다 1950년 월남한 故장기려 박사는 한국전쟁 중 발생한 전상자와 극빈환자에 대한 무료치료를 시작하다 1951년 부산 영도에 정착해 피난민들을 위한 복음병원을, 1958년에는 행려병자를 위해 토성동에 행려병자 무료 진료소를 차렸다. 복음병원은 설립 초부터 지금까지 매년 국내 도서산간 지역을 대상으로 5-6차례 의료 지원을 이어가고 있으며 해외 의료 봉사도 매년 6-7차례 진행하고 있다.
임학 고신대 복음병원 원장은 “자선과 기부에 의해 세워진 의료기관들은 현재까지 우리나라 보건의료 부문을 이끌어 나가는 많은 의료기관들의 출발이 되었다”면서 “현재와 같은 보건의료체계를 형하고 발전시키며 의료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발전하는 데 중심축의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눔은 정부와 기업이 못하는 일을 해내기도 했다. 국제로타리클럽이 세계적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보급하고 캠페인을 벌인 덕에 1960~70년대만 해도 흔했던 소아마비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전영순 월드비전 국내사업본부 본부장은 “한국전쟁 직후 월드비전은 백선 육아원과 다비다모자원 등을 세우고 60년대부터 약 30억원의 원조 자금을 들여왔는데 이는 당시 해외 원조 총액의 8%에 해당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기부발목 잡는 나라
글로벌 나눔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한국은 1995년 세계은행의 원조 대상국 명단에서 아예 빠진다. 2009년 개발 원조의 선진국 클럽이라 불리는 ‘개발원조위원회(DAC)’의 신규 회원국까지 됐다. 하지만 세계로부터 받은 나눔을 되갚아주기엔 한국의 기부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 국세청이 집계한 기부금 신고 현황을 보면 2013년까지 매년 증가하던 기부금은 2014년 처음 대폭 감소해 11조9989억원이 됐다. 1년 전보다 4870억원이나 줄어든 것이다.
왜일까. 전문가들은 “기부 문화 발목 잡는 제도가 문제”라고 지적한다. 최근 ‘소득세법 일부 개정안’을 제출한 이혜훈 의원은 “기부금 연말정산 공제 방식이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전환되면서 기부자들의 세금 부담이 높아져 기부 문화가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에 따르면 2013년 연말정산까지는 종합소득이 7000만원인 근로자가 350만원을 기부하면 84만원의 세금이 감면됐지만, 2014년부터는 감면액이 52만5000원으로 이전보다 38%나 줄었다.
이 의원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기부금이 소득공제 대상이고, 세액공제방식의 프랑스조차 공제율이 66%에서 75%에 달한다”며 “이번 개정안은 경기 악화, 소비심리 위축 등으로 기부 자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세제혜택을 통해 우리사회의 기부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주식을 기부하고도 세금 폭탄을 맞을 수 있는 ‘상속증여세법’도 손질이 필요하다. 현행법상 공익 법인에 출연하는 재산은 상속·증여세를 과세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익 법인 출연 재산이 영리 법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인 경우 5%(성실 공익 법인 10%)를 초과하는 지분엔 상속·증여세를 매긴다. 대기업 오너들이 그룹 지배를 위해 공익 법인을 우회로로 삼는 꼼수를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당초 법 취지와 달리 선의에 의한 주식 기부까지 차단할 수 있다는 지적이 많다. 황필상 전 수원교차로 대표가 대표적 예다. 황 전 대표는 2002년 자신이 보유한 수원교차로 주식 지분 90%(180억원)를 출연해 구원장학재단을 설립했으나, 과세 당국은 황 전 대표가 기부한 주식이 5%를 초과했다며 증여세 140억원을 부과했다. 이에 기재부는 상속·증여세 비과세 기준을 최대 20%까지 늘리는 내용을 골자로 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을 지난달 2일 발표했다.
규제 중심인 ‘기부 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이하 기부금품법)의 개정 필요성도 요구된다. 현행 기부금품법에 따르면 1000만원 이상의 기부금을 모집하려면 사전에 행자부 또는 관할 시도에 등록해야 한다(제4조 1항). 등록 기간 내에 해당 모금액을 넘으면 불법이 되고, 3년 이하의 징역 및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비영리단체들은 “기부 금액과 날짜 등은 예측이 불가능한데, 이를 사전에 등록하도록 규제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NGO 성장을 방해한다”며 “모금 단체 대부분이 이 법을 잘 모르는데 행자부조차도 법의 해석을 두고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선 기부금 규모조차 들쭉날쭉이다. 국세청 통계에 따른 기부금 총액이 약 12조원인 데 반해 기부금품법에 따라 행자부에 등록된 기부금은 5700여억원(2016년)에 불과하다. 이에 진선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비영리단체들의 의견을 담은 기부금품법 개정안을 작년 7월 발의했으나 법안은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지난해 6월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정안을 다시 발의해 위원회 심사 중에 있다.
염형국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단체는 기부금 모집에 대해 이미 등록된 소관 부처에 매년 예산·결산보고서를 제출하는 등 감독을 받고 있는데, 별도로 행자부 규제를 받는 것은 과잉 규제”라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한 현실적인 방향으로 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