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제작소, ‘좋은 일을 찾아라’ 보드게임 출시
월급 많은 정규직? 수평적 조직문화? 당신이 원하는 일 경험은?
‘헬조선 노동자’로 산다는 것, 만만치 않다. 노동시간은 OECD 국가 1위. 야근은 일상. 매번 불려가는 회식자리에, 상사 눈치로 다 쓰지도 못하는 연차와 휴가. ‘가슴 뛰는 일을 하라’며 사회는 속삭이지만, 정작 ‘무엇을 좋아하는지’ 시도해 볼 시간도, 경제적 여력도 부족하다. ‘좋은 일’이란 건 ‘꿈을 찾았다는’ 몇 명만의 이야기여야 할까.
나에게 맞는 ‘좋은 일’을 찾고 싶은 이들을 위해 새로운 보드게임이 나왔다. 희망제작소에서 제작한 보드게임의 이름은 ‘좋은 일을 찾아라’.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든 게임이 아니다. 1년 넘게 이어져 온 ‘좋은 일, 공정한 노동’ 연구(이하 ‘좋은 일’ 연구)가 기반이 됐다. 반응도 뜨겁다. 네이버 해피빈 공감펀딩에 올린지 3일만에 150%가 넘는 모금액이 모였다. 보드게임 참여자들로부턴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뭔지, 처음으로 생각했던 기회였다”, “퇴사했던 이유가 이제야 설명되는 것 같다”는 반응도 이어졌다.
비정규직, 청년 실업, 장시간 노동… 짚고 넘어가야 할 ‘노동 의제’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좋은 일’을 이야기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2015년 11월부터, ‘좋은 일’ 연구를 이끌어 온 황세원(38∙사진)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은 “우리가 원하는 일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때, 나쁜 일을 줄이고 좋은 일을 늘려갈 수 있다”며 “연구 결과를 더 많은 이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끝에 보드게임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에게 ‘지금, 좋은 일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일을 원하십니까. 정규직이기만 하면 되나요?”
ㅡ‘좋은 일’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이유가 뭔가.
“우리 사회에 ‘나쁜 일’ 사례는 넘쳐난다. 비정규직이 전체 일자리의 절반에 육박하고, 야근은 당연한 일상이다. 노동시간은 OECD국가 1등이다. 임금은 오르지 않고, 노동조합도 약하다. 그럼 우리에게 ‘좋은 일’이란 어때야 할까. 우리 사회엔 ‘좋은 일’에 대한 상(像)은 부족하다. 최소한 우리가 ‘어떤 일을 원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봤다. ‘좋은 일’의 기준을 잡아보고 싶었다.”
ㅡ비정규직, 청년 실업 문제만 해도 심각하다. ‘좋은 일’을 이야기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일이 없거나, 비정규직이라 한 치 앞도 모르는데 ‘좋은 일’이 웬 말이냐는 거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시작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간 ‘정규직, 대기업, 공무원’을 막연히 ‘좋은 일’로 여겼다. 그렇다보니 정치권에서 내놓는 정책도 ‘일자리를 창출하겠다, 정규직을 늘린다’는 식이다. 몇 개 되지도 않는 일을 향해 모두가 달려는데, 정작 힘들게 일을 얻었다 해도 본인과 잘 맞거나 행복하리란 보장도 없다. 일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다양해지고 있는데, 기존의 ‘일자리’ 정책에서는 이런 것들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좋은 일’은 어때야 하는지가 그려져야, 나쁜 일을 줄여가고 좋은 일을 늘려갈 수 있다.”
그는 “기업에 다니든, 카페 바리스타로 일하든, 프리랜서든, 본인의 일과 삶에 만족하면서도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어야 행복한 사회”라며 “우리나라는 ‘내가 좋아하는 일’은 생각해 볼 기회도 없고, 설사 고민해서 자기가 원하는 일을 택했다고 해도 먹고 살기 어려워 나가 떨어지는 구조”라고 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재미있고, 성장하는 일’
사람들이 원하는 일은 어떤 것일까. ‘정규직’이기만 하면 될까. 월급만 많으면 될까. 2015년 11월부터 ‘좋은 일, 공정한 일’의 기준을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온라인 설문조사도 돌리고,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일을 묻는 ‘심층 워크숍’도 열었다. ‘좋은 일’의 요건을 시험하는 곳들도 하나씩 찾아 만났다. 주 4일 출근제를 실시하는 시민단체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4일 일하고 4일 쉰다는 ㈜풀무원의 충북 음성 두부공장, 노동 조합을 통해 근무 환경을 개선했다는 ‘로레알 코리아 노동조합’, 재미있는 직장으로 불린다는 ‘우아한 형제들’…. 사회 곳곳에 ‘더 나은 일’을 만들려는 시도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적당히 벌고 잘 살기’의 저자 김진선씨,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의 저자이자 롤링다이스 협동조합 대표인 제현주씨 등을 인터뷰하며 ‘좋은 일’을 앞서 고민하며 살고 있는 이들의 생각도 엮어냈다. 연구를 바탕으로 ‘좋은 일을 위한 단순명료한 정책요구 토론회’도 열었다. 연구 결과는 전자책 헌잡 줄게, 새잡 다오로도 냈다. 1년 여에 걸쳐 ‘좋은 일’의 요건들을 들여다 본 느낌은 어땠을까.
ㅡ설문조사 결과는 어땠나.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일’이라는 게 뭔가.
“1만5000여명이 참여한 온라인 설문조사에서 나온 ‘좋은 일’이란 이렇다. 노동시간은 짧고, 개인의 삶을 존중하는 일. 재미도 있고, 성장하는 일. 조직 내에서 승진하는 것, 정규직, 고용 안정성 등 과거에 ‘좋은 일’로 여겨졌던 기준과는 간극이 컸다. 단, 모두에게 완벽한 단 하나의 ‘좋은 일’은 없다. 노동시간, 임금, 삶과의 균형, 조직 문화, 개인적인 주관과 가치 등 ‘일’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나에게 더 중요하고 우선순위가 높은 가치를 가진 게 ‘나에게 좋은 일’이다.”
ㅡ‘좋은 일’도 좋지만 여전히 ‘일자리 창출’과 ‘정규직’은 중요하지 않나. 문재인 정부도 ‘81만개 공공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언했고, ‘공공기관부터 비정규직을 없애겠다’며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데.
“정규직이란 개념도 잘 들여다봐야 한다. 전통적인 ‘정규직 vs. 비정규직’ 구분으로만 고용 현실을 봐선 답이 없다. 요새는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하면 ‘무기계약직’을 내놓는다. 정규직은 ‘기간에 정함이 없는 고용계약’이라고 되어있으니, 법적으론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선 부서 통폐합 등을 이유로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면 그만이고, 임금∙승진 등에서도 대우가 다르다. ‘정규직’이라고 알려진 곳조차 일자리의 질이 점점 떨어진다는 거다. ‘일자리를 늘리겠다’, ‘정규직을 늘리겠다’는 구호만으로는 안정적인 ‘좋은 일’이 늘어난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더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법과 정책을 살펴야 한다.”
ㅡ연구 과정에서 여러 기관, 단체,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나.
“생각보다 좋은 기업이 많아 놀랐다. 서로 존중하고 합의하는 문화만 있다면, 어느 직장이나 조금 더 나은 곳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서울메트로환경’이라는 곳은 서울 지하철 1~4호선 청소노동자들로 구성된 회사다. 3년 전, 용역회사 비정규직 전원을 정규직으로 고용했다. 인터뷰를 해보니 다들 본인 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면서 임금도 오르고, 팀장급 승진도 가능해졌다. 전문적인 청소 교육도 받게 됐다.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인정받고, 존중 받는 느낌’을 받았다고 하더라. ‘나이 들어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한다는 게 좋다’는 분도 있었다. 지하철 청소는 아침마다 토사물을 치우는 일이 잦아 청소업계에서도 3D 업종에 속한다는 데도, 이제는 ‘꿈의 직장’으로 불린다더라. 이런 변화들이 소문나면서 채용 경쟁률도 높아졌고 지원자 나이도 젊어졌다.”
◇당신에게 ‘좋은 일’, 모두에게 ‘좋은 정책’
1년에 걸친 연구를 녹여냈다는 보드게임. 게임은 총 2라운드로 진행된다. 1라운드는 ‘나에게 좋은 일 찾기’. 2라운드는 ‘우리’에게 좋은 정책 찾기. 이런저런 세부 ‘규칙’이 있지만 기본 원리는 단순하다. 내가 가진 ‘자원 칩’을 내고, 원하는 ‘일 경험’ 카드를 구매하는 것. 모두에겐 동일한 ‘시간’ 칩이 주어지지만, 각자의 실제 상황에 따라 ‘스펙’, ‘가족지원’, ‘끈기’, ‘산전수전’ 칩은 각기 다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대 원칙 하나, 최대한 ‘나 자신’에게 감정 이입할 것. 가상의 ‘억만장자’가 되어 땅 사고 건물 짓는 ‘부루마블’이 아니다. 나의 상황과 주관, 성향에 몰입해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일 경험’ 카드 48장엔 연구에서 도출된 각기 다른 ‘일의 요소’들이 담겼다. 상명하복 문화가 지긋지긋한 사람을 위한 ‘수평적 조직문화’ 카드, 맡은 기한 내 일은 처리하되 근무시간이나 장소에서 자유롭고 싶은 사람을 위한 ‘알아서 근무’ 카드, 젊은 날 ‘미친 듯이 일해보고 싶다’는 이들은 ‘밤낮없이 열정적으로 일함’ 카드 등을 구매할 수 있다. ‘정규직 대기업’, ‘프리랜서’ 같이 고용 형태를 담은 카드에서부터, ‘정치적, 사회적 성향에 맞는 일’, ‘성차별, 학력차별 없음’, ‘튼튼한 노동조합이 있는 곳’ 같이 ‘성격’을 설명한 카드도 있다. 각각의 카드마다 내야 하는 칩의 개수도 다르다. 카드가 쌓이다 보면 ‘일 경험 카드’에 있는 퍼즐 색깔과 모양에 따라 자신의 퍼즐 판을 채운다. 3명 중 누군가가 퍼즐 판을 먼저 채우는 사람이 승자. 모은 경험 카드, 퍼즐 경향을 바탕으로 ‘나에게 좋은 일’도 분석할 수 있다.
1부에서 ‘성향’을 찾았다면, 2부는 ‘모두를 위한’ 정책을 찾는 시간이다. 3명이 한 팀이 되어, 모두가 가진 카드 중 3장을 활용해 좋은 ‘정책 카드’를 사오면 된다. ‘알고 입사할 권리, 없습니까?’, ‘노동권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쉬었다 일해도 괜찮아’ 등 정책 카드에는 연구에서 나왔던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들이 하나씩 담겼다. 황 연구원은 “한국에서는 내가 원하는 일을 알고 노력만 한다고 해서 ‘좋은 일’ 찾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며 “우리가 힘을 모아 좋은 정책을 획득해야 우리 사회 내 ‘좋은 일’이 더 많아진다는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연구에서 도출된 실질적인 ‘노동 정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보고자 2라운드를 만들었다”고 했다.
ㅡ노동조합이니, 최저임금이니, 노동법이나 노동 정책 등은 나와는 먼 일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많을 것 같다. 정책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가령 신입사원이 입사를 한다고 하자. 계약서가 법을 위반한 걸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안다고 해도 이의를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만약 근로계약 체결방법을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교육한다거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지방노동청과 연계해 사업주와 근로자가 각각 1본씩 사본을 갖게 하는 방식을 도입하면 근로자가 잘못된 계약을 맺는 것을 보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구인광고에 근무조건이나 임금 정보를 상세하게 표기하도록 의무화한다거나, 프리랜서건 정규직이건 4대 보험 등에서 동일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 현실적인 수준의 최저임금을 설정하는 것이나, 실업급여를 확대해 본인이 ‘원하는’ 일을 고민할 여지를 주는 정책 등 정책을 잘 만들면 모두에게 ‘좋은 일’ 기반을 닦아갈 수 있다.”
ㅡ우리 사회에서 ‘좋은 일’이 더 많아지기 위해, 무엇부터 바뀌어야 할까.
“일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한국은 초 단기 근속국가다. OECD 근속연수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직장을 들어가면 그 중 30%가 1년 내 관둔다. 그런데 정책은 여전히 20대에 직장을 구해, 가정도 꾸리고 아이도 낳고 한평생 근속하다가 퇴직하는 모델을 기준으로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일하기의 방식, 일에서 기대하는 요소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조직은 결국 구성원들이 모인 곳 아닌가. 근로기준법, 최저임금법 등은 ‘최저 마지노선’을 명시한 것이지, 그것대로만 하라고 권고하는 게 아니다. 하나씩 대화하고, 요구하고, 실험하고, 시도하면 안될 것은 없다고 본다.”
그가 속한 희망제작소에서도 올해부터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을 근무시간에 포함시켜, 하루 8시간을 근무하기로 한 것. 8시에 출근하면 4시에, 9시 출근이면 5시에 퇴근한다. “높은 이직율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한 시도다. 한 달에 하루는 ‘반짝데이’로 정해 유급휴가를 준다. 가족이나 일에서 벗어나 나의 성장을 위한 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장려한다. 낮에 영화 보기, 한강에서 멍 때리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 관람하기…. 지금까지 공유됐던 ‘반짝데이’ 활동들이다. 헬조선, 퍽퍽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겐 ‘좋은 일’, ‘좋은 정책’에 대한 더 많은 수다가 필요한 건 아닐까. ‘좋은 일을 찾아라’ 보드게임이 그 첫 판을 깔았다.
좋은 일을 찾아라|희망제작소|공감펀딩|게임 온라인 설명서 바로가기|구입 문의(02-2031-2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