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비틀기식’ 강제모금이 2016년 대한민국을 강타했다. 일부 공익재단의 ‘톱다운(top-down) 방식’ 모금은 투명성 논란을 일으켰고, 이는 시민의 기부 의지를 꺾어버렸다. 한편, 100만 촛불 민심이 새로운 정치 바람을 일으키듯, ‘보텀업(bottom-up) 방식’의 크라우드 펀딩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크라우드 펀딩은 자금이 없는 예술가나 사회활동가, 벤처기업 등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공개하고 익명의 다수에게 기부나 투자를 받는 방식이다. 국내 최초의 온라인 기부 플랫폼 네이버 해피빈도 2015년 6월, ‘공감 펀딩’이라는 이름의 2세대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를 론칭했다. 기존의 기부 플랫폼이 공익단체만 모금할 수 있었다면, 공감 펀딩은 진입 문턱을 대폭 낮췄다. 미디어, 소셜 벤처,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심지어 일반 기업이어도 누구든지 공익 목적으로 펀딩을 개설할 수 있다. 지난 1년 6개월간 공감 펀딩에 지갑을 연 개미투자자는 7만6000명에 달하며, 이들의 펀딩 액수는 총 16억5600만원(2016년 11월 기준)에 이른다. 더나은미래는 연말을 맞아, 해피빈 공감 펀딩의 성공 사례를 중심으로 후원금 이상의 임팩트, ‘펀딩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을 추적 취재했다. /편집자
◇ 농산물 판로 개척, 청년 농부 12명 기 살렸다
컴퓨터 공학도 유상미(31)씨는 2년 전 ‘류가농원’의 사과 농부로 전업했다. 충북 충주에서 13년간 과수원을 운영해온 부모님과 함께 농사를 짓는다. 열매를 솎아내고, 가지를 정리하고, 3000평 땅에서 쉬지 않고 땀 흘리는 만큼 보람도 크다. 마이스터대학, 지자체 영농 교육을 받으며 배운 지식을 농장에 적용한다. 유씨의 원칙은 ‘제조체를 쓰지 않는 것’. 유씨의 가장 큰 고민은 ‘판로’다. 사과값이 변동될 때마다 손해를 보기 때문. 직거래 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고민하던 그녀는 해피빈 공감 펀딩의 문을 두드렸다. 유씨는 ‘사과의 왕’으로 불리는 부사와 애플파이로 구성된 세트 상품 5종(최소 1만8000원부터 최대 5만5000원까지)을 소개했고, 한 달 만에 1703만8000원(목표 대비 3407%)어치가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동안 지인 위주로 판매돼 매출이 늘지 않았는데, 공감 펀딩 이후 매출이 5배 올랐어요. 네이버 메인에 계속 노출되니 문의 전화도 엄청 많이 왔죠. ‘이렇게 맛있는 사과는 태어나서 처음 먹었다’는 고객의 피드백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강원도 원주에서 ‘건강한 고구마’를 재배하는 귀농 5년 차 조정치(35)씨. 20년 차 농부인 아버지가 정성스레 재배한 고구마로 달콤한 군고구마 말랭이를 만들어 판매했다. 친환경으로 직접 재배한 고구마 100%를 설탕 등 첨가물 없이 만든 말랭이 상품인 만큼, 반응은 뜨거웠다. 한 달 만에 상반기 매출 목표인 1338만2400원어치가 판매됐다. 공감 펀딩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는 청년 농부들이다. 이들은 네이버와 소셜벤처 ‘농사펀드’의 ‘가업을 잇는 청년농부 프로젝트’를 통해 든든한 홍보 창구뿐만 아니라 각종 농산물 디자인 패키지 제작 지원까지 받았다. 2016년 11월까지 청년 농부 12명이 공감 펀딩으로 올린 매출은 총 8507만6300원에 이른다.
◇신경섬유종 앓는 33세 심현희씨, 지원 사업 전문가 자문위원회까지 꾸려져
지난 10월, 신경섬유종으로 얼굴 전체가 종양으로 뒤덮인 심현희씨 이야기가 온·오프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와 스브스뉴스, 네이버 해피빈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사연이 알려지면서 십시일반 모인 금액은 무려 10억여원. 해피빈 공감펀딩 플랫폼에서만 최다 후원 금액인 4억 9020여만원이 모였다. 기부자들은 ‘힘내라’, ‘쾌유를 빈다’는 응원과 함께, ‘기부금을 잘 써달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모금이 종료된 지난 11월, 심씨의 후원금을 관리·전달하는 밀알복지재단은 ‘심현희 지원 사업 전문가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2000년대 초반 ‘산골 소녀 영자 사건’과 같은 비극을 막고, 거액 기부금을 장기간 체계적으로 사용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2000년 7월, KBS 2TV 인간극장을 통해 산골 소녀 영자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후원이 이뤄졌지만, 한 50대 남자가 영자의 CF 출연료와 후원금을 노리고 영자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다. 재능 기부로 참여하는 의사·사회복지학과 교수·변호사 등 8인의 자문위원회는 지난달 10일, 첫 모임을 가지고 심씨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고려해 향후 기부금 사용 계획과 방법을 논의했다.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은 단연 ‘의료비 지원’이었다. 기부금의 80%는 심씨의 종양 제거와 안면 수술에 사용될 예정이며, 간병비 등 의료 보조비(7.42%)와 의료 보장구 구입비(0.58%) 등 세부 항목별 운용 계획도 세워졌다. 기부금 중 일부(10%)는 생업에 종사하기 어려웠던 심씨의 가족 생계비로 쓰일 예정이다. 그녀와 같이 신경섬유종을 앓고 있는 어머니의 수술도 준비 중이다. 현재 심씨는 얼굴에 있던 1㎏가량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재활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다. 심씨 어머니의 의료비, 생계비 등도 순차적으로 지급된 상태. 밀알복지재단 관계자는 “분기별로 자문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기부금 진행 사항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밀랍캔들’로 열성 팬 확보하며 해외 공략하는 비틀에코
강원도 춘천에 위치한 ‘비틀에코협동조합(이하 비틀에코)’은 세 차례 공감 펀딩을 통해 회사 열성 팬들을 확보했다.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며 곤충에게 관심을 둔 한이곤(28) 대표를 포함해 직원 단 2명으로 구성된 비틀에코는 생태계 교육 및 강사 양성, 생태계 보존의 의미를 담은 제품을 판매하는 협동조합이다. 지난해 7월, 비틀에코는 벌집을 녹인 ‘밀랍’이란 낯선 재료로 만든 캔들을 선보였다. 공감펀딩 페이지에는 제품 소개보다 ‘꿀벌 이야기’가 가득했다. 한이곤(28) 대표는 “환경문제로 국내에서 꿀벌의 90%가 사라지면서 꿀벌로 열매 맺던 오이나 당근과 같은 식재료의 70%도 사라진다”면서 “곤충과 사람이 함께 살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했다.
진심이 통했을까. 네티즌들은 제품 구매뿐 아니라 ‘환경을 생각해 포장을 바꿔보자’, ‘할아버지가 양봉을 하시는데, 필요하면 밀랍을 구해서 보내주겠다’ 등 하루에 수백개 댓글로 응원을 보냈다. 목표 펀딩 금액이었던 250만원을 3배 이상 넘긴 780여만원을 펀딩하는 데 성공했다. 한이곤 대표는 “공장에서 물건이 잘못 나와 배송이 일주일 늦어져 주문 고객 모두에게 개별 연락을 드렸더니, 화를 내기보다 ‘한여름에 고생한다’, ‘천천히 보내도 된다’ 등 격려를 보내주셨다”고 했다. 신뢰 덕분에 위기를 넘긴 것이다. 공감 펀딩에서 선보인 캔들의 올해 매출만 5억원. 내년 초에는 일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에도 이 제품을 소개할 계획이다.
한편, 비틀에코는 펀딩 수익금으로 평생 제주도에서 양봉업을 해온 김인순 어머니 농가와 ‘꿀벌이 보내온 선물’ 공감 펀딩을 공동으로 진행했다. 농가에서는 제주도 곳곳에서 친환경으로 모은 꿀 1톤을 내놨고, 비틀에코는 꿀 용기와 포장 박스 등을 디자인했다. 2주 만에 1200명이 참여해, 5600여만원이 펀딩(목표 대비 2816%)될 정도로 반응응 뜨거웠다. 포장 박스 안에도 ‘환경 파괴로 내년엔 더 이상 이 꿀을 받아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공익적 메시지를 담았다. 펀딩 수익금의 70%는 김인순 어머니 농가로 고스란히 전달했다.
◇자폐 디자이너가 만들어내는 감각적인 디자인 상품, 세상에 선보이다
지난 2월, 네이버 메인화면에 뜬 사진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도자기 접시, 수첩, 머그잔, 휴대용 충전기 등 감각적인 디자인 상품이 공감 펀딩에 올라온 것. 기존에 보지 못한 파격적 디자인이었다. 한 달 만에 825만3800원어치가 판매됐다. 펀딩의 주인공은 사회적기업 ‘오티스타’. 디자이너 8명 모두 자폐인이다. 25년간 자폐를 연구해온 이소현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교수가 2012년 자폐인 자립을 위해 디자인회사를 설립한 것. 지난 5년간 디자인스쿨을 운영해 자폐인 13명을 정식 디자이너로 취업시켰다. 이 교수는 “국내 자폐 발생률이 10명 중 2명꼴로 굉장히 높은데, 이 중 상당수가 시각적 표현 능력을 갖고 태어난다”면서 “5년간 꾸준히 오티스타 디자이너들의 역량을 인정받은 덕분인지, 삼성전자와 제휴해 갤럭시 S7 휴대폰 케이스를 직접 제작했고, 롯데 사보 디자인도 맡았다”고 말했다.
공감 펀딩 덕분에 홍보 효과도 컸다. “주로 장애의 달(4월), 어린이날, 자폐인의 날(4월 2일)에 판매가 몰리는데 네이버에 소개된 이후 꾸준히 판매가 일어나고 있어요. 특히 공감 펀딩에 올라온 따뜻한 댓글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직원들과 하나하나 읽으면서 울고 웃었죠.” 이후 10개월, 그 사이 좋은 소식도 많았다. 전문대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뒤 몇몇 회사를 전전해야 했던 김이석(가명·29)씨가 지난 12월 1일자로 디자인회사 ‘에이랜드’에 채용된 것. 이 교수는 “자폐 디자이너들의 재능과 특성에 맞는 다양한 취업 및 자립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오티스타의 비전”이라고 했다.
펀딩, 세상을 바꾸다 ②편에서 계속
정유진·김경하·주선영·강미애 더나은미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