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 자율학습 시간, 책상에 엎드려 깊은 잠에 빠진 학생이 있다. 준비물을 자주 챙겨 오지 못하거나 방과 후 친구들과의 모임을 한사코 마다하는 학생도 있다. 겉으로는 소극적이거나 학업 의욕이 부족한 학생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일상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중병이나 장애, 정신질환을 겪는 부모나 형제를 돌보고 집안일까지 책임지는 ‘영케어러(가족돌봄청소년)’의 고단한 삶이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동안 영케어러 문제는 개별 가정이 감당해야 할 사적인 어려움이나 ‘효행’의 관점에서 다뤄지곤 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마주하는 현실은 다르다. 과도한 돌봄 부담은 청소년이 누려야 할 학습과 휴식, 관계와 성장의 기회를 제약한다. 한 개인과 가족의 문제를 넘어 청소년의 기본적인 발달권을 위협하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비용을 키울 수 있는 구조적 문제다.
첫째, 돌봄 부담은 일상적인 학업 결손을 낳고 미래의 기회까지 제한할 수 있다. 만성적인 피로와 밤샘 간병은 지각과 결석, 수업 집중도 저하로 이어진다. 학습 결손이 장기간 누적되면 진학과 진로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노동시장 진입과 경제적 자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청소년기에 짊어진 돌봄의 무게가 한 사람의 생애 전반을 흔들 수 있는 이유다.
둘째, 기존의 ‘신청주의’ 복지 체계만으로는 이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케어러 청소년 상당수는 가족의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꺼린다. 자신이 수행하는 돌봄을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 ‘가족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받아들이기도 한다. 스스로 복지기관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는 만큼, 학생들의 변화를 일상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학교 현장에서 먼저 발견하고 지원으로 연결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셋째,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성 장학금이나 생계비 지원만이 아니다. 학생 개인을 대상으로 한 학습·정서 지원과 함께, 가족이 지자체와 보건·복지기관의 간병·돌봄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통합적 자원 연계’가 필요하다. 가정 안의 돌봄 부담 자체가 줄어들지 않는다면 학생의 일상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어렵다. 공공과 민간의 다양한 복지 자원이 학교라는 생활 현장을 거쳐 학생과 가족에게 맞춤형으로 연결돼야 하는 이유다.
올해부터 본격 시행된 ‘학생맞춤통합지원법’은 이러한 변화를 가능하게 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학생이 겪는 어려움을 학업이나 경제, 심리·정서 등의 개별 문제로 나누어 접근하는 대신, 학교와 교육지원청,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 기관이 협력해 필요한 지원을 통합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아직 제도 시행 초기인 만큼, 앞으로 중요한 것은 법의 취지가 학교 현장에서 실제 협력 체계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영케어러 지원의 핵심은 시혜적 온정을 베푸는 데 있지 않다. 아이가 감당하고 있는 돌봄의 부담을 가족만의 책임으로 남겨두지 않고 공적 돌봄 체계와 지역사회가 함께 나눔으로써, 아이들이 본래 누려야 할 학업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더 이상 아이들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미래를 미뤄두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학교를 영케어러 조기 발견의 중요한 거점으로 삼고, 발견된 학생을 지역사회의 돌봄·복지 자원과 촘촘하게 연결하는 선제적 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학교와 지역사회가 함께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돌봄의 짐을 나눌 때, 영케어러 청소년도 비로소 자신의 삶과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김해정 한국학교사회복지사협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