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혼자 전쟁터에 서 있었고 나를 잃어가며 누군가의 하루를 지켰다.”
인천광역시청년미래센터의 수기공모전 모음집 ‘마음을 전하는 청년들의 기록’에 담긴 한 가족돌봄 청소년의 고백이다. 이 짧은 한 문장에는 보호받고 성장해야 할 시기에 홀로 돌봄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던 아픔과 고립감이 담겨 있다.
초록우산이 현장에서 만나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또래들이 진로를 고민하고 미래를 준비할 때, 이들은 아픈 가족의 약을 챙기고 생계를 걱정한다.
이제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의 문제는 개인이나 한 가정만의 어려움으로 남겨둘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구조적 문제다.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이들이 감당하는 현실의 무게를 실감한다.
돌봄은 흔히 가족 간 사랑과 책임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보호받아야 할 아동·청소년이 오히려 부모나 조부모, 아픈 형제자매를 돌봐야 하는 상황은 다르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고립’과 ‘시간의 상실’이다.
가족의 질병이나 장애는 가정의 경제적 기반까지 흔들 수 있다. 생계를 보태기 위해 아이들이 학업을 중단하거나 간병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일도 생긴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는 사이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시간과 기회도 줄어든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돌볼 여유를 잃고 번아웃과 고립을 경험하는 아이들도 있다.
아동복지전문기관 초록우산은 2021년부터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둘러싼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원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족돌봄아동·청소년 2267명을 발굴해 긴급 지원을 했다.
특히 돌봄 부담이 높은 117명에게는 ‘돌봄부담경감 프로젝트’를 통해 돌봄코디네이터를 일대일로 연결하고 맞춤형 현금과 서비스를 지원했다. 돌봄코디네이터가 가정을 정기적으로 찾아 돌봄 상황과 필요한 지원을 살피고, 전문 간병인 파견과 가사서비스, 의료비 등을 연계하는 방식이다. 학습과 심리·정서, 진로 지원도 함께 제공해 아이들이 자신의 일상과 미래를 다시 돌볼 수 있도록 했다.
그 결과 프로젝트에 참여한 117명의 하루 평균 돌봄 시간은 3.9시간에서 2.57시간으로 1.33시간, 약 34% 줄었다. 한 아동은 프로젝트 참여 후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이들의 돌봄 부담을 덜고 자신의 시간을 돌려줄 때 비로소 학교생활과 친구 관계, 진로와 같은 평범한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 현장에서 확인한 사업의 중요한 변화다.
하지만 민간 아동복지 현장의 노력만으로 넓은 사각지대를 모두 메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정부와 국회에서도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시행됐고, 청년미래센터도 전국 17개 시도로 확대되고 있다.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러한 정책이 실제 아이들의 삶에 닿도록 지원체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일이다.
첫째, 조기 발굴 체계를 더욱 촘촘하게 구축해야 한다. 여전히 많은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이 지원체계 밖에서 홀로 돌봄을 감당하고 있다. 청년미래센터뿐 아니라 학교와 지역사회 복지관, 지자체 등이 긴밀하게 연결돼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가정환경과 돌봄 강도를 파악하고 필요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상시 발굴 체계도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둘째, 일회성 지원을 넘어 지속 가능한 맞춤형 복지 안전망을 마련해야 한다. 현재 청년미래센터를 통해 자기돌봄비 200만 원이 지원되고 있지만 장기간 이어지는 돌봄 부담과 경제적 어려움을 한 번의 지원만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지원이 끝난 뒤 다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아동·청소년의 연령과 환경, 돌봄 강도에 따른 단계별 지원이 이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이 직접 짊어지고 있는 돌봄노동을 줄이려면 간병비와 의료비 지원뿐 아니라 가족을 대신 돌봐줄 수 있는 공적 돌봄 서비스가 충분히 뒷받침돼야 한다.
셋째, 돌봄 부담을 줄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자립을 지원해야 한다. 가족돌봄아동·청소년 지원의 목적은 단순히 현재의 어려움을 덜어주는 데 있지 않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되찾고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지원이 일방적인 수혜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이 나이에 맞는 배움과 경험을 쌓으며 자신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학업을 이어가고 진로와 취업을 준비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자립 지원을 함께 제공할 때 아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
누구나 삶의 무게에 흔들릴 때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가족돌봄아동·청소년은 그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오랜 시간 가족을 돌봐왔다.
“나는 혼자 전쟁터에 서 있었다”는 고백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자신이 감당해온 돌봄의 무게를 조금씩 내려놓고 자신의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더 촘촘한 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김동민 초록우산 인천지역본부 복지사업팀 과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