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코니에 올라] 댄스 플로어에서 발코니로

허재형 루트임팩트 이사장

하버드 케네디스쿨에서 수십 년간 리더십을 가르쳐온 로널드 하이페츠(Ronald Heifetz)는 리더에게 “발코니에 올라가라”고 권한다. 댄스 플로어 한가운데에 있으면 음악과 몸짓에 휩쓸려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누구와 춤추고 있는지, 어떤 리듬이 반복되는지, 누가 플로어 밖에 홀로 서 있는지는 발코니에 올라야 비로소 보인다. 그는 좋은 리더란 플로어와 발코니를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지난 14년을 거의 내내 댄스 플로어에서 보냈다. 루트임팩트를 시작하고 2년쯤 지난 2014년, 우리는 성수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는 성수동 골목을 거닐면 공업소의 쇳소리가 울렸고, 물류창고 앞으로 트럭이 드나들었으며, 수제화 산업의 중심지답게 구두 부자재와 원단 업체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소셜벤처, 임팩트라는 단어조차 설명이 필요하던 시절, 그 골목에서 체인지메이커들이 모여 일할 공간과 커뮤니티를 짓고 사람과 조직을 잇고 돋우는 일을 해왔다. 그리고 이번 여름 나는 CEO 자리에서 물러나 이사장이자 공동창업자로서 한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동료들을 돕는 역할로 옮겨간다. 지난 6개월간 바통을 건넬 준비를 하며 자연스럽게 하게 된 일은 오래 머물렀던 플로어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풍경은 분명 달라졌다. 쇳소리가 울리던 골목에 카페와 브랜드 매장이 들어섰고, 성수동은 이제 ‘소셜벤처 밸리’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은 동네가 되었다. 임팩트 투자의 대상은 사회적기업과 소셜벤처를 넘어 일반 스타트업까지 확장됐다. 정부와 지자체, 기업과 재단도 임팩트 투자에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 다수의 정부 부처가 사회연대경제, 사회혁신 조직 육성 정책을 다투어 내놓았다. 대기업은 지원 대상을 넘어 사회적 가치 창출의 파트너로 협력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대학이 관련 교과 과정이나 비교과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됐다. 12년 전과 비교하면 믿기 어려운 변화다. 분명 임팩트 생태계는 만들어졌고 또 자랐다.

그런데 발코니에서 조금 더 오래 내려다보면 불편한 질문 하나가 올라온다. 생태계가 커진 것과 사회·환경 문제가 해결된 것은 과연 같은 일인가. 돌봄의 공백도, 기후위기도, 지역의 소멸도 12년 전보다 가벼워지지 않았다. 플레이어의 수는 늘었다. 하지만 그들이 추는 춤의 패턴, 즉 자원이 흐르는 방식, 제도와 관행,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방식 등도 그만큼 달라졌을까.

이것이 나만의 감각은 아닌 듯하다. 최근 루트임팩트가 동료 조직들과 함께 생태계 구성원 100여 명에게 물었을 때, 가장 많은 이들이 지금의 생태계를 ‘고착 국면’으로 진단했다. 응답자의 80% 이상이 사회·환경 문제는 과거보다 복잡해졌다고 답했다. 그러나 문제의 재정의나 자원 배분 구조까지 함께 다루는 깊은 협력을 경험했다는 응답은 다섯에 하나가 되지 않았다. 협력의 접점은 늘었는데, 협력의 문법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하이페츠의 또 다른 통찰이 여기서 유효하다. 그는 문제를 두 종류로 나눈다. 기술적 문제(technical problem)는 답이 이미 알려져 있어 기존의 지식과 권한으로 풀 수 있는 문제다. 반면 적응적 도전(adaptive challenge)은 문제의 정의 자체가 불분명하고, 해법이 기존 방식의 연장선에 없으며, 관련된 모두가 자신의 가치와 역할을 바꿔야만 풀리는 문제다. 그가 경고한 리더십의 가장 흔한 실패는 적응적 도전을 기술적 처방으로 다루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환경 문제라는 적응적 도전 앞에서 익숙한 처방을 반복해 온 것은 아닐까. 지원 공간과 지원 사업을 하나 더 만들고, 펀드를 하나 더 조성하고, 경진대회를 하나 더 여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건 한국만의 질문도 아닌 듯하다.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필란트로피 아시아 서밋에 참석했을 때, 사흘 내내 서로 다른 주제의 세션들이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하는 것을 지켜봤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자본도, 솔루션도, 선의도 아니라 그것들을 정렬하고 조정하는 구조와 신뢰라는 것이다. 한 글로벌 재단 리더의 자조 섞인 농담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필란트로피에는 공군보다 파일럿이 많다.” 시범사업은 넘쳐나는데 사업을 시스템 변화로까지 만들어내는 일은 없다는 이야기로 들렸다. 성수동의 풍경과 싱가포르의 대화는 같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지난 시기의 일들은 분명 필요했다. 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체인지메이커’, ‘사회혁신가’로 호명해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고 문제 해결의 개별 주체들을 육성하고 연결하는 일, 즉 없던 생태계를 짓는 일은 지난 10여 년의 첫 번째 과제였다.

하지만 이제 다음 10년의 질문은 달라야 한다. 시스템이 바뀐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정책과 자원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고, 그 아래에서 관계와 권력의 구조가 바뀌는 것이며,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바뀌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과제가 선명해진다. 중간지원조직은 프로그램 운영자를 넘어 판 전체의 변화를 촉매하고 조율하는 역할로 자신을 재정의해야 한다. 임팩트 자본은 빠른 성과 증명을 요구하는 돈을 넘어 구조 변화의 긴 호흡을 견디는 인내심 있는 돈이 돼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검증된 모델의 확산만이 아니라 정책의 앞단에서 실험할 공간을 열고 법 제도에 적극 반영해야 한다.

발코니에 오르는 것은 현장을 떠나는 일이 아니다. 하이페츠가 강조했듯 발코니의 목적은 관조가 아니라, 더 나은 개입을 위해 패턴을 읽는 데 있다. 앞으로 이 자리에서 발코니에서 본 풍경을 한 장면씩 기록하려 한다. 생태계의 다음 단계를 가로막는 구조는 무엇인지, 협력과 자본과 제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여기서 읽어낸 패턴이 다시 플로어로 내려가, 지금 그곳에서 춤추고 있는 이들의 다음 스텝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함께 출 다음 곡이 더 즐겁기 위해서 말이다.

※ 본문에 인용된 조사 결과는 루트임팩트가 진저티프로젝트·임팩트리서치랩과 함께 연구해 발행한 보고서 『판을 바꾸는 협력: 사회혁신 생태계에 던지는 새로운 제안』(2026)에서 가져왔다.

허재형 루트임팩트 이사장

필자 소개

2012년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를 공동 설립해 사회·환경 문제를 혁신적으로 해결하는 체인지메이커들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돕는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헤이그라운드를 중심으로 성수동 지역을 소셜벤처 밸리로 만들었고, 임팩트 커리어 플랫폼 및 임팩트 필란트로피를 통해 인재와 자선 자본을 임팩트 조직에 연결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러한 한국 사회혁신 생태계 조성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아 2022년 오바마 아시아 태평양 리더로 선정됐으며, 루트임팩트는 제4회 대한민국 사회적경제 박람회에서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습니다. 루트임팩트 공동 설립 전에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Bain & Company에서 전략 컨설턴트로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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