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구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으니, 한 국가의 외교는 그 나라의 문화를 많이 따라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겸손이 미덕이고, 침묵이 금이라고 배운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잘하는 것을 전략적으로 알리고 포지셔닝 하는 데 여전히 어색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것이 많은데도 깨닫지 못하거나 알아도 남들이 알아주기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자랑스러워해 봄 직한 K-vaccine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또 K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국제사회는 잘 알고 있는 이야기, 바로 콜레라 예방의 숨은 영웅 한국 백신의 이야기입니다.
콜레라는 사실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질병입니다. 깨끗한 물과 위생 시설에 접근하기 어려운 개발도상국에서 주로 발생해 흔히 ‘후진국 병’이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콜레라는 비브리오 콜레라균에 오염된 음식이나 물을 통해 전파되는 급성 설사병입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몇 시간 내로 탈수로 사망할 수 있는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특히 5세 미만 아동이 가장 큰 희생자입니다. 게다가 증상이 없는 감염자가 배출한 콜레라균이 환경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습니다. 특히 화장실 같은 위생 시설이 부족한 지역에서 콜레라는 더욱 빠르게 확산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2023년 약 54만 건의 콜레라 사례가 보고됐으며 이에 따라 4000명이 넘게 사망했습니다. 주로 아프가니스탄, 콩고민주공화국(DRC), 소말리아 등 분쟁 취약국에서 발생했습니다
콜레라 감염이 증가하는 이유에는 기후 변화와 국제적 분쟁, 대규모 난민 이동 등의 환경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기후 변화로 홍수와 가뭄이 잦아지면서 수질 오염 문제가 악화하고, 분쟁 지역에서는 위생 시설과 보건 시스템이 붕괴해 감염의 위험이 커집니다. 예를 들어, 예멘과 같은 분쟁 지역에서는 깨끗한 물과 기본적인 위생 서비스를 전혀 제공받지 못하며 콜레라 창궐은 전쟁의 총탄을 피해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마저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콜레라를 예방하고 확산을 억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콜레라 백신입니다. 경구용 백신, 즉 입으로 삼켜 먹는 콜레라 백신이 발병 위험이 지역에 필수적인 예방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콜레라 백신을 전 세계에 독점 공급하고 있는 기업이 한국에 있다면. 콜레라로 죽어가는 개발도상국 아동들을 살릴 수 있는 예방책이 한국에 있다면. 한국이 생산을 멈추면 매년 수천 명의 아동이 콜레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면. 이런 사실을 뉴욕 타임스 같은 매체가 보도했다면 세계가 주목할 만하지 않을까요?
이 콜레라 백신을 생산하는 한국 기업은 강원도 춘천에 본사를 둔 유바이오로직스라는 회사입니다. 유바이오로직스는 국제백신연구소(IVI)와 빌 게이츠 재단의 지원을 받아 경구용 콜레라 백신을 개발했고, 세계보건기구 인증을 받아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을 통해 전 세계 저개발국에 백신을 공급하고 있습니다.
2023년 한 해에만 약 700억원 규모의 백신을 공급하면서 콜레라 백신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동시에 사회적 임팩트와 수익성을 모두 확보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세계백신면역연합은 앞으로 콜레라 발병이 전 세계적으로 더욱 증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에 대비해 세계백신면역연합은 콜레라 백신을 미리 구매해 위기 발생 시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비상용 백신을 비축하고 있으며, 유바이오로직스와 같은 협력 기업과 함께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 아동들을 살리는 백신을 생산하는 한국 기업, 그 백신으로 예방되는 질병과 생명들, 다른 국가들이 뛰어들지 않는 콜레라 백신 시장에서 유일하게 남은 한국 기업. 그 덕분에 매년 수백억 원이 넘는 수출 실적을 내는 기업. 이런 기업을 가진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벌어지는 콜레라 대응에 큰 역할을 하는 공여국으로 포지셔닝을 하고 국제 보건 외교에서 목소리를 더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DA)로 연간 6조 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고 있는 주요 원조국 중 하나입니다. 재정을 지원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기술로 개발도상국 아동들의 생명까지 살리고 있습니다. 다수가 선진국을 위한 백신을 만들 때 가장 취약한 지역의 질병을 위한 백신으로 사람들의 삶을 지켜내고 있다는 한국의 스토리는 자부심을 가져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이 콜레라 백신으로 국제 보건에 기여하는 역할을 전략적으로 홍보하고 콜레라와 관련된 국제 보건 이슈들을 더 면밀하게 챙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어떻게 백신을 넘어 보건 시스템 전반을 지원할지, 그로 인한 임팩트 스토리를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런 포지셔닝으로 국제 보건과 외교 현장에서 얼마나 한국의 위상을 높이고 공여에 걸맞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한국이 남들이 짜주는 판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새로운 이슈들을 제안하고 만들어가는 리더십을 가지기를 기대해 봅니다.
겸손과 침묵이 항상 미덕은 아닙니다. 목소리를 낼 이유가 있을 때는 내어 봐야 합니다. 특히나 그곳에서 우리가 사람을 살리고 있다면 말이죠. 한국의 소설과 드라마가 그렇듯, 우리는 알고 보면 서사에 능한 민족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재능을 국제 보건과 외교 무대에도 써봤으면 하는 소망입니다.
김형준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선임 매니저
필자 소개 현재 미국 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입니다. 이전에는 국제기구 유니세프에서 약 10년간 근무하며 네팔, 가나, 말레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개발도상국 아동과 청소년의 건강한 삶을 위해 활동했습니다. 동시에 세계백신면역연합(Gavi)에서 선임 매니저로 일하며 백신으로 저개발국의 아동들을 살리는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개발도상국에서 보건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로 일하며 질병 예방으로 사람을 살리는 다양한 방법을 경험했고, 이를 많은 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