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고용으로 업무 성과 좋아진 기업들… 불량 원두·라면 스프 이물질 골라내는 작업 반복 행동에 집중하는 발달장애인 장점과 맞아 장애인 취업률 높아지고 기업의 이직률 낮아져
1988년 유럽에서 시작돼 전 세계적으로 700만명 이상이 관람할 만큼 흥행한 체험 공연 ‘어둠 속의 대화(Dialogue in the dark)’에는 놀라운 반전이 있다. 빛이 없는 깜깜한 공간을 이동하는 내내 관객을 능수능란하게 이끌어주던 가이드는 체험이 끝날 무렵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참가자는 “와아~” 하는 탄성을 지른다. 이 체험 공연의 성공으로 무려 7000명의 시각장애인 일자리가 새로 만들어졌다. 장애가 ‘기회’로 바뀐 대표적인 일자리 사례를 찾아봤다. 편집자 주
작업장에 들어서자 맵싸한 기운이 감돌았다. 김희수(27) 커피지아 대표가 “생두(Green Bean)에선 원래 매캐한 향이 난다”고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하얀 위생복 차림의 청년 세 명. 세숫대야 같은 용기(容器)에 수북이 쌓인 콩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 들고나는 사람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나쁜 콩을 찾고 있어요. 한 알만 있어도 커피 3잔 정도가 텁텁해지죠.” 김 대표가 설명하는 일을 맡은 직원들, 이 회사에선 ‘초능력 콩 감별사’라고 부른다. 총 10명이 교대로 일하는데, 모두 발달장애인들이다. 이인석(22·발달장애2급)씨는 2년 반 경력의 베테랑이다. “커피 맛있어. 검은 걸 골라내서 맛있어. 일이 제일 재밌어.” 이씨가 하얀 마스크와 위생모 사이로 눈만 보이며 말했다. 이씨의 어머니 기은숙(49)씨는 “아침에 ‘회사 가기 싫다’는 말을 한 번도 못 들어봤다”고 말했다.
◇잔꾀 없는 우직함, 발달장애인이 가진 ‘초능력’
지난 3일 방문한 서울 강남구 개포동의 ‘커피지아'(서울시 예비사회적기업)는 작은 커피공장이다. 한 달에 1.5톤(t) 정도의 원두를 생산하는데, 이는 커피 15만잔을 만들 수 있는 양이다. 공정의 시작은 ‘결점두'(생두 중에 결함이 있는 콩) 골라내기, 일명 ‘핸드픽(Hand Pick)’이다. 이를 전담하는 것이 10명의 발달장애인들. 한 명당 하루 3시간, 주 15시간 정도 일하고 50만원 정도의 월급도 받는다. 2011년 8월 김 대표는 오로지 “맛있는 커피를 만들겠다”는 사명으로 회사를 차렸다. 애초엔 비장애인 2명을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해 결점두 고르는 작업을 맡겼는데 금세 지루해하고, 퇴사도 잦았다. 그러던 어느 날, 특수학교 교사였던 친구가 신선한 제안을 했다. “우리 아이들한테 일을 시켜보는 게 어때?” 혹시나 하며 한두 달가량 일을 가르쳤는데 결과가 놀라웠다. 반복적이고 동일한 행동을 좋아하는 자폐성 장애인의 특성과 핸드픽 작업의 궁합이 딱 들어맞았던 것. 발달장애인의 평균 취업률은 2.19%로 장애인 중 가장 낮다. 이 사실은 김 대표를 강하게 자극했다. 한마음복지관, 밀알학교 등 지역 특수학교 및 복지관에서 발달장애인을 커피지아 실습 과정(1개월)에 보내면, 그중 핸드픽 작업에 잘 맞는 학생을 스카우트했다.
“근로계약서를 썼던 첫날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아이가 취업했다고 전라도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축하한다고 서울에 올라온 거예요. 눈물까지 글썽거리면서 고맙다고 하시는 걸 보며 발달장애인에게 ‘일자리’가 얼마나 큰 고민인지 느끼게 됐죠. 어떤 부모님은 아이를 저희 회사에 출근시키면서 난생 처음 조조 영화를 봤다고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김 대표는 발달장애인, 자폐성 장애인의 특성을 공부하기 위해 아예 사회복지사 자격증(2급)까지 땄다. 현재 커피지아는 전문 사회복지사를 고용해 생두 고르기 작업 외에 인지능력 향상 등 재활훈련 시간도 할애한다. 김 대표는 “매출이 향상되면 발달장애인의 직업재활뿐 아니라 교육·여가까지 원스톱(one-stop)으로 제공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신생브랜드라 판로 개척이 쉽지는 않지만, ‘커피 맛’으로 승부하고 있는 점도 고무적이다. SK케미칼 사내 카페에서 사원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는데, 4개 후보군 중에서 커피지아의 원두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지난달부터 SK케미칼에 원두를 납품하고 있다. 김 대표는 “사회적 가치, 비즈니스 가치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마음이 없다”며 “회사가 더 커져서 더 많은 장애인을 고용하면, 아예 초능력 콩 감별사 커피를 하나의 프리미엄 제품 라인으로 분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시에 위치한 ‘㈜삼양티에이치에스(T.H.S)’ 역시 이들의 ‘초능력’을 발견한 회사다. 정태운 삼양티에이치에스 대표는 “라면생산 공정 중에 스프에서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이 있는데, 워낙 반복적이라 (비장애인들의 경우) 집중도가 떨어졌다”고 했다. 삼양식품은 2010년 이 공정을 따로 떼어내, 자회사형 장애인 표준사업장을 설립했다. 식품회사로선 최초의 시도다. 현재 30명(중증 15명·경증 8명·근무지원 7명)의 장애인 근로자가 1일 8시간씩 일한다. 정태운 대표는 “장애인들과 회사를 꾸린 이후 업무 성과가 더 좋게 나오고 있으며, 이직(移職)도 손에 꼽을 정도라 고용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 “장애요? 우리에겐 특별한 기술이죠!”
“웹 접근성은 시각장애인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상지장애인(어깨에서 손에 이르는 부분의 장애)일 경우 마우스 사용이 힘들고, 비장애인도 환경에 따라서 키보드만 사용할 경우도 있지요. 청각장애인을 위해서는 영상에 자막을 달아야 하는 것이 의무이고요. 장애 유형과 경증에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홈페이지를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 우리의 업무입니다.”
사회적기업 ‘웹와치주식회사’(이하 웹와치) 이경욱(35·시각장애3급) 대리가 왼손으로 키보드 탭(Tab)키를 세 번 누르자 ‘스크린 리더(컴퓨터 화면을 음성으로 읽어주는 프로그램)’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로그인입니다.” 이 대리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로그인’ 메뉴를 시각장애인이 인지하기 위해서는 웹사이트 코딩 과정에서 이미지 파일을 대체하는 텍스트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웹와치에서 모바일 접근성 관련 진단 업무를 맡고 있는 5년5개월 경력의 명승현(35·시각장애3급) 대리는 “장애 당사자가 아니고선 그들의 불편함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사용자 입장에서 여러 가지 고려를 하고, 진단과 컨설팅을 진행한다는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사를 견인하는 힘은 ‘장애’다. 현재 23명 직원 중 14명(약 60%)이 시각·지체·청각장애인이다. 이들은 장애인, 노약자, 저시력자 등 인터넷에서 소외됐던 사람들 모두가 편리하게 웹·모바일에 접근할 수 있도록 웹 접근성 품질인증 심사 항목(22개)에 맞춰 검사한다. 웹사이트의 오류를 수정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반복해 불편함이 없다고 판단되면 우수 사이트 인증을 준다. 박종혁(32·뇌병변 2급) 연구원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면접에서 낙방하곤 했는데, 내 능력을 값지게 써주는 회사에 와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고 했다. 웹와치는 지난 2009년 한국장애인인권포럼 사업단으로 출발했다. 2008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을 계기로, 2009년 이후 약 300여 개의 사이트, 100개 기관과 웹 접근성 사업을 수행해 오고 있다. 올해부터 국가기관·금융기관·민간기업 등 총 482곳의 홈페이지를 평가하고 웹 접근성 우수사이트 인증을 진행했다. 지난해 매출은 24억원가량이다.
올 1월에는 미래창조과학부로부터 ‘웹 접근성 품질인증기관’으로 지정받았다(현재 웹와치, 한국웹접근성인증평가원,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가 웹 접근성 인증기관으로 활동 중이다). 이범재(지체장애2급) 웹와치 대표는 “장애인들이 사회복지·문화·정보·행정 서비스 등의 분야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지점을 발굴해, 그들이 가진 능력으로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잠재력 끌어낸 장애인 일자리, 장애에 대한 편견 없앤다
“나 오늘 ‘오후조’인데, 이거 받으려고 일찍 나왔잖아.” 지난 5일 오전, 김한나(31·에스원씨알엠㈜ 고객상담팀)씨가 4층 휴게실 한편에 위치한 ‘네일아트실’을 찾았다. 김씨가 “내일 중요한 모임이 있어요. 수수한 듯 화려하게”라며 자리에 앉자, 이설(32·청각장애3급) 네일아트사가 빙그레 웃으며 바삐 손을 움직였다. 손에 얇은 천을 두르고, 절도 있게 마사지를 하는 손길에선 숙련도가 느껴진다. 김한나씨는 “이분들 덕에 ‘손 예뻐졌다’는 소릴 많이 듣는다”며 “특히 손톱에 직접 그리는 그림과 문양들은 정말 예술”이라고 했다.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에스원씨알엠이 청각장애인을 사내 네일아트사로 고용한 건 2012년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제안이 계기가 됐다. 김미응 에스원씨알엠 업무지원팀장은 “우리 회사는 ‘삼성에스원’의 자회사형 표준사업장으로 ‘콜센터’ 업무가 주인데, 여사원들이 감성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스트레스를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며 “2명의 청각장애인 네일아트사가 주5일 하루 5시간씩 직원들과 만나는데, 주말에도 예약할 정도로 인기 있다”고 말했다. 직원들은 구화(口話)나 필담(筆談)으로 소통하며 서로 간의 벽을 허문다. 김한나씨는 “손끝 각질 제거 같은 건 칼을 쓰기 때문에 신뢰하지 못하면 여기 앉지 못한다”며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아가며, 회사에서 편하게 서비스를 받은 게 벌써 2년이나 됐다”고 했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이 일산직업능력개발원과 함께 진행 중인 청각장애인 네일아트사 육성은 2012년 시범실시 후 큰 호응을 얻어 여러 기업으로 확대됐다. 첫해 에어코리아·삼성에스원씨알엠㈜·신한생명 등의 기업에서 5명이 정규직 시간제 일자리로 채용됐고, 이듬해부턴 효성아이티엑스(8명)·카페베네(2명)·코레일관광개발(4명)·삼성카드(3명)도 앞다투어 사내에 공간을 마련했다. 임미화 한국장애인고용공단 차장은 “청각장애인 중에는 미술 분야 등 시각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많고, 수화를 하기 때문에 손기능도 탁월해 네일아트에 안성맞춤”이라고 말했다. 초창기 기업에 취직됐던 청각장애인이 일산직업능력개발원에 네일아트 강사로 나서는 케이스도 생겼다고 한다. 에스원씨알엠에서 근무하는 이현경(26·청각장애2급) 네일아트사는 “좋은 기술과 재료를 배우러 지난달엔 사비로 일본의 (네일아트) 박람회를 다녀왔다”며 “더 열심히 경쟁력을 쌓아 나만의 숍을 운영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최태욱 기자 김경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