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간의 대장정 끝에 제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에서 ‘손실과 피해’ 기금에 대한 합의가 도출됐다. 기후변화에 대한 막중한 책임과 수조 달러에 이르는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될 수 있다는 우려로 그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온 미국과 유럽이 개도국의 피해를 보상하는 합의에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20일(이하 현지 시각) CNN·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COP27 의장인 사메 수크리 이집트 외무장관은 ‘손실과 피해’ 기금 조성 방안을 담은 총회 결정문을 당사국 합의로 채택했다고 밝혔다. 지난 6일 이집트 샤름 엘 셰이크에서 개막한 총회는 원해 18일 폐막 예정이었으나 기금 조성 안건에서 당사국 간 견해차가 좁혀지지 않자 이날 새벽까지 연장 협상이 이어진 것이다.
기후변화로 이상기후, 해수면 상승 등의 피해를 본 개발도상국에 선진국이 별도의 보상을 하는 ‘손실과 피해’ 기금은 올해 총회의 주요 쟁점이었다. 그동안 개도국은 기후변화 피해 보상을 위한 기금을 별도로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선진국들은 이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해왔다. 기후위기에 대해 무한 책임을 져야 하는 데다 보상 액수도 천문학적인 수준이기 때문이다.
올해 총회는 달랐다. 그간 기금 조성 반대 측에 서 있던 미국과 유럽이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주요 선진국이 기후변화 초래의 책임을 인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협상 과정을 지켜본 NGO와 개도국들은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이번 총회가 정의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면서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무너진 신뢰를 재건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했던 신호”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다만, 해결되지 못한 과제들이 남았다. 보상 주체와 대상, 기금 운용 방식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또 손실과 피해 기금은 법적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선진국의 자발성에 의존한다는 문제도 있다. 미국 바이든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개도국의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춘 합의일뿐, 법적 의무나 보상금 조항은 포함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는 다음 COP에서나 논의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 중국 등은 손실과 피해 기금 이행 국가에서 빠졌다는 것도 구멍으로 지적된다. 1992년 유엔 기후변화협약 채택 당시를 기준으로 ‘선진국’을 정의하면서, 협약 이후에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 중동 산유국, 중국, 한국 등은 제외된 것이다.
장다울 그린피스 전문위원은 “한국은 단기간에 개도국에서 주요 온실가스 배출 선진산업국으로 변모했기 때문에 특수한 지위를 악용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지위에 걸맞은 기후 리더십을 선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도 올해 총회에서는 석유·천연가스 등 모든 종류의 화석연료 사용을 감축하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당사국 모두의 동의를 얻는 데 실패했다. 대신 지구 온도 상승 폭 1.5도 제한 목표와 석탄화력발전의 단계적 축소는 유지하기로 했다. 이에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주요 배출국의 화석연료 사용 감축을 위한 새로운 약속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마누엘 풀가-비달 세계자연기금(WWF) 글로벌 기후·에너지 총괄 담당자는 “올해 총회에서 손실과 피해 기금 조성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건 긍정적인 진보의 발걸음이지만,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세계 종말을 위한 기금’이 될 위험이 있다”면서 “각국 정부는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혁신적인 조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