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은 스타트업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날렵한 변신과 빠른 성장이 특징인 스타트업의 속성을 고려할 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 반기를 드는 창업가들이 나타났다. 청년들은 ‘농업에 왜 농사만 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농축산물 부가가치는 30조원 수준에 멈춰 있지만, 그 농축산물을 둘러싼 전후방 가치사슬의 부가가치는 수백조원에 이를 수도 있다. 눈을 해외로 돌리면 이 규모는 수백 배 더 커진다.
2014년 월가의 투자가 짐 로저스가 서울대 경영대 강의에서 농업이 미래산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다. 우리나라 농가의 평균 경작면적은 1헥타르(1만㎡)를 조금 넘어가는 수준에 불과해 첨단기술에 대한 투자는 비용으로 인식됐다. 반면에 시장분석 전문기관들은 글로벌 농업시장은 연평균 6% 내외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했다. 아시아 태평양지역은 전 세계 농업 시장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인구와 소득도 가장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짐 로저스의 관점에서 아시아 농업에 대한 투자는 충분한 수익성을 보장되는 안전자산이었다.
2022년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농업계에서는 작은 파문이 일었다. 창업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농업 스타트업이 1700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마켓컬리, 오아시스 등 농식품 유통업에서 이 정도 규모의 투자는 더러 있었지만 농업 생산이 중심인 기업에서는 처음이었다. 이 소식은 기술산업 전문 뉴스인 테크크런치(TechCrunch)를 통해서 전 세계에 소개되기도 했다. 지금까지는 ICT 분야의 대기업과 선진국의 농식품 기업만 소개되던 글로벌 뉴스에 우리나라 스마트농업 스타트업인 그린랩스가 소개됐다.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2015년 농업 스타트업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고 있을 때 대부분의 스타트업 관계자들은 농업도 스타트업이 가능한가라고 물었다. 스타트업 행사에 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되기 십상이었고, 정부의 노력에도 농업 생산분야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는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바뀌었다. ICT와 바이오 기술을 접목한 농업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이 벤처캐피탈 업계에서 크게 일고 있다.
우리 농업계를 돌아보면 변한 게 별로 없는 듯한데, 무엇이 외부의 시선을 이렇게 바꿨을까? 엔씽의 김혜연 대표의 말이 떠올랐다. “왜 농사는 농민들만 짓는다고 생각하세요?” 시스템 속에 있는 사람들은 그 세계가 멈춰 있는 듯 보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게 보인다. 우리의 인식은 농사는 농민이 짓는다고 고정되어 있지만, 방제와 수분, 수확 등 이미 많은 농사는 기업의 서비스로 제공되고, 농사일은 전통적인 농민뿐만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노동자가 참여하는 산업으로 바뀌고 있다. 사실 이런 농사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으면 이미 농사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앞으로 농업은 어떻게 변해갈까? 그린랩스 신상훈 대표의 말이 인상적으로 들렸다. “우리는 더 이상 투자를 받을 여유가 없지만, 벤처투자사들은 제2의 그린랩스를 발굴하려고 눈에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린랩스의 농업정보 및 B2B 마켓서비스는 이미 50만명이 가입되어 있다. 농자재부터 농업 생산, 농산물 유통까지 농산물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면서 농민과 소비자 사이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엔씽은 도시 근교의 물류센터 옆에 대규모 수직농장형 스마트팜을 만들어 샐러드 시장의 성장을 견인할 준비를 마쳤다. 올해는 축산 분야의 스타트업들이 준비한 서비스도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해가 될 전망이다. 농업 스타트업은 농촌의 일손 부족을 해소하고, 농자재를 더 싸게 공급하고, 저탄소 농업을 확산하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농산물의 가치를 새롭게 발굴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성장해나갈 것이다.
농업은 멈춘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는 엄청난 변화의 에너지가 축적됐고, 이제 본격적으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농업 스타트업들은 농장을 경영하는 농민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나가는 파트너다. 세계로 시선을 돌려 개도국의 식량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에도 함께할 수 있었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의 식량안보는 다른 나라의 농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농업은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핵심 산업이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