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로 기억한다. 팀장님이 자리로 부르시더니 대뜸 “최대리가 연구소의 ‘사회공헌 사업’ 기획을 좀 해줘야겠다”고 하셨다. “본사에서 우리 연구소에 사회공헌 예산을 배정했는데, 어떻게 사용하는 게 좋을지 고민을 좀 해봐.”
당시 나는 현대기아자동차 기술연구소 PR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왠지 큰 미션을 받은 것처럼 흥분됐다. 입사 후 8년간 의전과 홍보를 담당한 내게 사회공헌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곧바로 필립 코틀러의 ‘CSR 마케팅’, ‘기업은 왜 사회적책임에 주목하는가?’ 등 몇권의 필독서를 찾아 읽었다. 또 연구소가 위치한 화성 지역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 지자체, 화성시 새마을회, 사회복지시설 등 현장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을 만나면서 놀랐던 게 한둘이 아니다. 우선 주민들은 현대기아차 연구소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수년간 PR 담당자로서 수도 없이 “우리 연구소는 1만여명의 연구원이 디자인, 설계, 시험, 평가 등 신차 개발의 모든 프로세스를 한 곳에서 할 수 있는 100만평 규모의 세계적인 연구소”라고 자랑을 했는데, 정작 지역 주민들은 그런 세계적인 연구소가 화성시에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지만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을 알게 된 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우연히 맡은 사회공헌 업무는 지역사회와 친해지고 소통할 수 있는 훌륭한 채널이 될 것만 같았다.
한번은 막 개관한 화성아트홀에 사전 약속 없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현대차에서 왔는데 팀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더니, 그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차 안 삽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에야 화성아트홀 팀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화성아트홀과는 내가 연구소를 떠날 때까지 사회공헌 파트너로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추석을 앞두고 수천만원 상당의 농협상품권을 지역을 위해 사용하라는 미션을 받았던 일도 기억에 남는다. 복지관에 일괄적으로 배분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좀 더 필요한 곳에 알차게 사용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새마을회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무국장님은 각 마을에 있는 새마을부녀회를 활용해보자고 하셨다. 농촌 지역 독거 어르신을 대상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전에 조사한 뒤 ‘맞춤형 지원’을 하자는 얘기였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번거롭고 힘들어 진땀을 뺐던 기억이 난다. 후회가 살짝 밀려들기도 했지만 어르신들을 만나는 순간 싹 사라졌다. 임직원봉사단이 물건을 사 들고 마을을 찾아갈 때마다 부녀회는 어르신들께 식사를 대접하며 동네잔치를 벌였고, 원했던 물품을 선물로 받은 어르신들은 아이처럼 기뻐하셨다. 나에게 주어진 자원을 더 고민하고 노력하면서 잘 써야겠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진행한 과학교육 수업, 굿네이버스 화성지부와 함께 준비한 캄보디아 해외봉사, 화성 지역 취약계층 일자리 마련을 위해 새마을회와 함께 설립한 사회적기업 ‘H&S 두리반’ 등도 기억에 남는다. 지역 사회의 여러 단체와 파트너십을 맺으며 크고 작은 성과를 냈고, 사회공헌이 ‘기업’과 ‘지역사회’를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2010년 연구소에서 본사 사회문화팀으로 자리를 옮기고 10년이 흘렀다.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1년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 기준인 ‘ISO26000’이 발표됐고, 같은 해 마이클 포터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arvard Business Review)에 CSR과 비즈니스의 통합이라는 ‘CSV’ 개념을 제시했다. 2015년에는 유엔(UN)이 SDGs(지속가능개발목표) 17개를 제시했고, 전 세계 195개국이 모여 2050년까지 탄소중립과 신재생에너지 비중 50% 이상을 달성하는 ‘파리기후변화협약’을 체결했다. 최근에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가 대세다. 1990년대 시작된 지역사회 기부와 자선활동 중심의 사회공헌이 이제는 이해관계자 중심의 지속가능경영으로 전환되고 있다.
세계를 덮친 코로나로 우리 사회는 언택트, 디지털화, 에너지 전환이라는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기업의 사회공헌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다. 지역사회와 소통하는 사회공헌 활동의 중요성이다. 지역이 힘들 때 어려움을 나누고, 지역에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 촌스럽지만 이것만큼 효과적이고 보람있는 일이 없다.
최재호 현대자동차그룹 사회문화팀 책임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