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진실의 방] 느슨하게 위대하게

연말이 다가오면 슬슬 압박이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내년 공익 분야 트렌드와 전망을 짚어달라는 요청들이 밀려든다. 제3섹터 트렌드, 기부·모금 전망, CSR 트렌드 등을 분석해 발표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게 오늘 자 신문에 게재한 ‘기업 사회공헌 전망’이다. 내년에 기업들이 사회공헌 예산을 얼마나 쓸 것이며 어떤 종류의 사회공헌 사업을 진행할 것인지 대략적인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 ‘매출 상위 1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순탄치 않다. 서로가 하나의 ‘표’ 안에 나란히 담겨 비교되는 걸 기업들이 매우 조심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대기업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0월 더나은미래가 주최한 ‘CSR커넥트포럼’은 국내 사회공헌 역사에 기록될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표 안에 같이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기업들을 한 무대에 세운 것이다. ‘아동·청소년’을 주제로 사회공헌을 하고 있는 5개 기업을 모아 포럼을 열었는데, 내용도 좋았지만 기업들이 이렇게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삼성디스플레이, GS칼텍스, CJ문화재단, 현대자동차그룹, 한국타이어나눔재단 담당자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던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공통의 관심사를 지닌 사람들이 모여서 일을 벌이고, 끝나면 각자의 자리로 쿨하게 흩어지는 ‘느슨한 연대’가 확산되고 있다. 환경 문제에 관심 있는 평범한 시민들이 ‘플라스틱 제로 운동’을 펼치거나, 비영리 단체들이 아동학대나 동물권 등 특정 주제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경우가 생겨나고 있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 사이에서도 ‘연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곤 했지만, 기업마다 색이 다르고 업종과 규모가 다르다 보니 진전이 잘 안 됐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좋은 기업들을 만났다. 각자의 목소리를 줄이고 공동의 목표에 집중하자는 것에 모두 흔쾌히 동의해 줬다. 기업 연대의 핵심이기도 하다.

포럼은 끝났지만 느슨한 연대는 계속된다. 내년에는 더 재밌는 걸 해보기로 했다. 아동·청소년 분야의 어젠다를 발굴해 제시하고 이슈화하는 ‘공동 캠페인’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이게 잘 된다면 후년쯤엔 그 이슈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기업들의 느슨한 연대가 이렇게 장기적으로 지속되고 발전한다면 놀라운 임팩트가 나올 것이다. 국제사회가 주목할 만한 새로운 사회공헌 모델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느슨하게, 그러나 위대하게.

[김시원 더나은미래 편집장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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