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6일(화)

내 자식들에게… 꼭 주고 싶은 선물, 아버지께 받은 ‘나눔 DNA’

국내 최초 기부신탁 1호
강석준 ㈜와이에스썸텍 대표

지난해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 마윈 회장의 ‘통 큰’ 기부가 화제였다. 3조원 규모의 공익신탁을 설립해 이를 환경오염 방지와 보건의료 개선에 투자하기로 한 것. 공익신탁이란 재산을 특정한 공익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신탁하는 것으로, 해외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고액 자산가들이 애용해온 일종의 ‘투자형’ 기부다. 인도 최대 재벌 타타그룹의 설립자 도랍지 타타(Dorabji Tata)는 1932년 인도의 보건·교육·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5억4000만달러(약 6400억원) 규모의 공익신탁을 설립하여 매년 7500만달러(약 880억원)를 기부하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주 빌 게이츠 역시 ‘빌 게이츠 트러스트 펀드’라는 신탁펀드를 운용하면서 현재까지 기부금으로 423억달러(약 50조원)를 사용했다. 미국에는 이렇게 원금 또는 일정 기간의 운용 수익을 기부하는 ‘자선신탁’ 수가 12만여개에 달하고, 그 규모만 1150억달러(134조9755억원)에 달한다.

나눔은대물림된다. ‘하나은행-SNUH 기부트러스트’ 의1호기부신탁가입자인강석준㈜와이에스썸텍대표는학교, 병 원 등에 고액을 후원해온 그의 아버지 강동신 ㈜와이에스썸텍 회장의 추천으로 1억원을 분당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이신영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나눔은대물림된다. ‘하나은행-SNUH 기부트러스트’ 의1호기부신탁가입자인강석준㈜와이에스썸텍대표는학교, 병 원 등에 고액을 후원해온 그의 아버지 강동신 ㈜와이에스썸텍 회장의 추천으로 1억원을 분당서울대병원에 기부했다. /이신영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국내에도 이제 막 공익신탁이 싹트고 있다. 지난 3월 공익신탁법이 시행되면서 재단처럼 별도의 조직이 없이도 재산을 관리·운용해 수익금을 공익사업에 기부할 수 있는 다양한 길이 열렸기 때문. 실제로 연기자 유동근, 국제구호전문가 한비야씨, 법무부 장관 및 직원, 분당서울대병원 등이 5개의 공익신탁을 출범한 데 이어, 하나은행과 분당서울대병원이 협력해 설립한 ‘하나-SNUH 기부트러스트(이하 기부신탁)’ 1호 가입자가 나타났다. 이는 기부자가 분당서울대병원에 기부한 돈을 하나은행에 신탁하고, 운용을 통해 발생한 수익금까지 기부자 이름으로 전달하는 새로운 모델이다. 1억원을 선뜻 내놓은 기부신탁 1호 주인공을 지난달 27일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만났다.

◇나눔의 대물림…아버지의 기부 DNA, 기부신탁 1호를 낳다

“똑같은 돈으로 더 많은 기부를 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습니다.”

부자(父子)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1억원을 병원에 ‘일시 기부’하는 대신 ‘기부신탁’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35년간 사업에 매진해온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 가지를 물려줬다. 자신이 경영해오던 매출액 60억원 규모의 건실한 중소기업 경영권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 1억원을 선뜻 기부하는 나눔 DNA가 바로 그것. 지난 6월, 1억원을 하나은행-분당서울대병원에 기부신탁한 강석준(37) ㈜와이에스썸텍 대표는 “서울대병원 벽면에 설치된 고액 기부자 명예의 전당에 아버지 이름과 회사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걸 봤다”면서 “그때 느낀 뭉클한 감동을 내 아이들에게도 물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지. 돈을 벌었으면 그만큼 나눠야지(웃음).” 옆에 앉아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던 강동신(72) ㈜와이에스썸텍 회장이 무릎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5남매 중 둘째인 저까지만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그때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눠야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겠다는 걸요. 많이 벌어 더 많이 나누고 싶단 생각 때문이었는지, 워커홀릭(일 중독)으로 살았죠.”(아버지 강동신 회장)

서울대 동문인 친구와 함께 엔지니어링 사업을 동업하던 강동신 회장은 1980년 적자 난 회사를 직접 인수했다. 그 후 직원 수 80명, 매출액 200억원 규모까지 회사를 키워 나갔다. ㈜와이에스썸텍은 고객의 주문에 따라 맞춤형 공업용 열처리 장비를 제작하는 회사다. 2000년 우수자본 재개발 대통령 표창, 2006년 신재생 우수전문기업에 선정될 정도로 우수 중소기업으로 꼽힌다. 지난해 아들 강석준씨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줬지만, 지금까지 그가 놓지 않고 있는 회사와의 연결고리가 하나 있다. 바로 임직원에게 직접 전하는 개인 기부금이다. 강동신 회장은 오래전부터 임직원의 자녀 교육비를 사재로 지원해왔다. 매월 초등학생 자녀 1명당 10만원, 중·고등학생 자녀 1명당 20만원씩, 그리고 자녀의 대학 입학금 전액을 지급하는 것. 그 비용만 1년 평균 약 5000만원에 달한다.

“규격화된 상품을 만드는 제조업과 달리, 맞춤형 장비 사업은 기복이 심해서 임직원 복지기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하기 어려웠어요. 처음엔 장학재단을 설립할까도 고민했는데, 운영비도 많이 들고 재단 특성상 임직원을 위한 기금 사용이 불가능하더군요. 그때부터 사재를 털어 직원들에게 ‘용돈 같은 기부’를 시작했죠. 직원들이 아이들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키울 수 있는 회사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대학, 병원, 복지기관 등 강동신 회장의 나눔은 그 후로도 계속 확산됐다. 그의 기부금으로 10년간 서울대 공대 학생 3~4명이 학비 걱정 없이 졸업했고, 서울대병원은 강동신 회장이 기부한 약 1억5000만원으로 부족한 연구 및 치료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원금+이자까지 기부한다…기부신탁의 맞춤형 서비스

올해 초, 중국 시장에서 철수한 강석준 대표는 회수된 개인 투자금 1억원을 기부할 곳을 찾고 있었다. 아버지 강동신 회장은 얼마 전 하나은행 PB(Private Banker)로부터 전해 들은 기부신탁을 추천했다. ‘하나-분당서울대병원 기부 트러스트’는 사후(死後) 또는 일정 기간 후에 기부해도 신탁 계약 직후 병원의 다양한 예우 프로그램(전담팀의 의료 상담, 진료 예약 서비스, 치료를 위한 병원 방문 시 마중부터 배웅까지 함께하는 ‘Door-To-Door’서비스 등)을 받을 수 있는 신개념 기부신탁 상품이다. 하나은행의 상속전담팀으로부터 상속 및 자산관리 솔루션 상담도 언제든지 받을 수 있고, 원금 외에 이자 수익까지 기부할 수 있다. 신탁 자금은 하나은행에서 신탁자의 의사에 따라 관리·운용해준다. 매년 운용된 개인 신탁자금의 상세 명세서와 피드백도 배송된다.

“예전에 하나은행 ‘바보의 나눔 적금’ 4구좌를 개설했습니다. 당시 적금 만기 해지 시 100원이라도 바보의 나눔 재단에 기부하면 연 0.5%의 우대금리를 더 주고, 하나은행은 가입 구좌당 100원씩 기부하는 상품이었죠. 당시 ‘예·적금 이자만이라도 매달 기부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수혜단체들은 좀 더 계획적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고, 굉장한 자금이 기부금으로 활용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기부신탁 이야길 듣고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죽고 난 후에도 매달 일정 금액이 좋은 곳에 투명하고, 꾸준히 쓰일 수 있는 모델이니까요.”(아들 강석준 대표)

1억원을 기부할 때 가족의 반대는 없었느냐는 질문에 강석준 대표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이들 부부는 벌써 9년 넘게 세이브더칠드런 아동 결연을 지속해왔고, 첫째 아들의 돌잔치 비용을 서울대병원에 기부하는 등 나눔에 적극적이다.

좀 더 직접적인 계기는 또 있었다. 지난해 여름, 아들이 가와사키병(혈관에 갑자기 염증이 생기는 질환)으로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찾게 된 것. 강석준씨는 “병실 문턱 하나를 지났더니 전혀 다른 세상이더라”면서 “병원에서 오랜 기간 치료를 받고 있는 환아들 모습을 보면서, 아픈 아이들을 위해 기부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기부한 1억원은 3년간 하나은행을 통해 관리·운용되고, 원금과 이자 모두 환자들의 치료 및 예방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다. 은행과 병원이 서로의 역량을 결합해 시너지를 높이는 모습도 신뢰가 갔다. 실제로 지난해까지 국내에 설정된 공익신탁은 1971년부터 하나은행이 설립·운용해온 ‘행복나눔신탁’이 유일했다. 공익신탁 관련 전담팀이 꾸려질 정도로 40년간의 노하우와 전문성이 쌓여온 것. 분당서울대병원은 병원장 사무실을 기부자들을 위한 공간(VIP 대외협력실)으로 바꾸고, 전문의 교수들이 직접 기부 상담부터 진료까지 전담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13년간 ㈜와이에스썸텍에서 일하며 경영 수업을 받은 강석준 대표는 최근 자율주행로봇 개발 등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위해 종횡무진 중이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업도, 나눔도 확장하려면 더 열심히 뛰어야 한다”며 눈빛을 빛낸다. 국내 최초 기부신탁 1호에 이름을 올린 그의 바람은 한 가지. 100호를 넘어 1000호까지, 기부신탁에 가입하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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