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8년간 길거리 배회하던 아이, 못다 한 배움 이어가다

교육 소외 아동·청소년 돕는 금천교육복지센터 집 안엔 박스와 잡동사니가 가득해 발 디딜 공간이 없었다. 돌돌 말린 달력 뭉치를 하나씩 펼쳐보니, 덧셈과 뺄셈이 틀린 숫자들로 빼곡했다. 지난 10여년간 정신분열증을 앓던 어머니가 수입과 지출을 계산한 흔적이었다. 2년 전 3월, 송현주 금천교육복지센터 개인성장지원팀장이 만난 정한(가명·22)씨의 집 안 풍경이다. ◇8년 동안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 대학에 합격하다 정한씨가 기억하는 학교의 모습은 2005년 가을이 마지막이었다. 어머니의 정신분열 증세가 심해지면서 그는 학교 대신 거리로 나섰다. “팥죽, 나물 등 같은 음식을 몇 개월 동안 계속 먹어야 했어요. 매일 같은 옷만 입다보니 친구들이 놀려서 학교 생활이 힘들었어요. 엄마에게 학교 간다는 거짓말을 하고, 산으로, 골목으로 돌아다녔죠.” 그러기를 8년. 의미 없이 흐르던 무채색 정한씨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것은 2013년 열아홉 살이 되어서였다. 우연히 아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가 초등학교를 찾아가 항의하면서 아무도 몰랐던 그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학교와 구청 복지정책과가 머리를 맞대고 인근 대안학교를 알아봤지만, ‘초등학교에서 책임지고 3년 안에 고등학교 과정까지 끝내라’는 어머니의 요구에 가로막혔다. 부모의 동의 없이 아무것도 진행할 수 없는 탓에 모두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당시 학교 교감 선생님이 금천교육복지센터에 SOS를 쳤다. “한시가 급하고 심각한 상황이라서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아이의 상태가 제일 중요했죠.” 송현주 팀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정한씨가 마음을 열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가 이야기를 나눴다. 센터를 통해 정한씨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그들에게 필요한 건… ‘한 고비’ 넘기는 힘

정신질환자 사회 복귀 지원… 구로구공동희망학교 송경옥 시설장 텃밭 가꾸기·역사·작문 등 일상 생활 관련 프로그램 활용… 2년 전부터 직업 체험도 운영 전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수학자 존 내시, 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 시인 최승자. 각자의 분야에서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받는 이들 네 사람은 모두 정신질환자라는 공통점을 갖고있다. 링컨 대통령은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수학자 존 내시와 시인 최승자는 조현병(정신분열증)으로 고통 받았다. 배우 캐서린 제타 존스는 조울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국내 18세 이상 74세 이하 성인의 정신질환 유병률은 27.6%(보건복지부·2011년). 성인 4명 중 1명 이상이 평생에 한 번쯤은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2014년까지 정신장애인에 등록된 이들은 불과 9만7000명. 장애 등록조차 하지 못한 채 변방에 남아 있는 정신질환의 현 상황을 보여주는 단적인 수치다. 지난 10여년의 세월을 정신장애인 사회 복귀 활동 최전선에서 달려온 사람이 있다. 송경옥(51) ‘구로구공동희망학교'(이하 ‘희망학교’) 시설장이 그 주인공이다. 희망학교는 정신의료기관에서 정기진료를 받고 있는 만 19세 이상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사회 적응 훈련과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정신장애인 사회 복귀 시설이다. ◇그들의 눈에서 희망을 보다 “지금도 정우(가명)를 잊지 못해요. 술도 끊고 ‘새 삶을 살아보겠다’며 다짐했던 친구였는데, 너무나 갑작스레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정우 어머니와 장례를 치르면서 이 사람들을 제대로 도우려면, 알코올중독 치료나 상담보다 더 복합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습니다. 사회복지사가 1년간 수련을 거치면 정신보건 전문요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기에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인천에서

“내가 그린 그림 ‘해피앤딩’처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길”

월드비전 ‘해피앤딩’ 캠페인에 재능 기부한 배우 유준상 “지난 2015년은 제 인생에서 참 특별한 해였어요. 데뷔 20주년을 맞기도 했고, 처음으로 우간다 긴급구호 현장도 방문했죠. 매일 아침 탈골된 팔로 사금(砂金)을 캐던 필립이 생각납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대신해 너무 일찍 어른이 돼버린 필립과 함께 열흘간 울고 웃으면서, 작은 관심과 사랑이 아이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이번에 기부한 그림들은 그때 기억을 되살려 그린 것이에요.” 배우 유준상이 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을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월드비전 ‘해피앤딩(Happy Anding)’ 캠페인에 직접 그린 그림을 재능 기부한 것. ‘꿈’ ‘나의 천사’ ‘마음과 마음’ ‘해피앤딩<그림>’ 등 그가 그린 그림 4점은 나눔 카드로 제작됐다. 카드의 판매 수익금은 긴급 구호 현장에 방한용품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유씨는 “그림 4점 중에서도 ‘해피앤딩’에 가장 애착이 간다”면서 “온 세상 어린이가 그림처럼 건강한 마을에서 자랄 수 있길 바라는 소망을 담았다”고 말했다. 해피앤딩은 남을 위해 나누고 남은 케이크 조각의 단면을, 나눔이 만들어낸 ‘기회의 문’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이번 ‘해피앤딩’ 캠페인의 메인 이미지로도 활용됐다. “어렸을 때 옆집에 누가 이사를 오면 꼭 떡을 돌리곤 했던 기억이 나요. 또 어머니가 김장을 담그시면 한두 포기는 꼭 동네에 홀로 사시는 어르신들에게 가져다 드리고 그랬거든요.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이웃 간의 오가는 정이 있었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일부에서 시작하는 게 진정한 나눔이 아닐까요?” 해피앤딩 카드 1세트(그림 카드 4장, 봉투 4장,

눈을 떼지 마세요, 아이들이 희망입니다

요르단 난민 캠프 찾은 강도욱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 배수시설 없어 위생 문제 심각 女兒 학대는 신고조차 안 돼 단순 생계 지원을 넘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게 돕고 싶어 “흔히 중동 국가라고 하면 사시사철 따뜻할 거라는 오해가 있는데 그렇지 않아요. 한겨울에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고 눈이 오기도 합니다. 시리아 난민들은 지금, 이 추운 겨울을 기본적인 방한복조차 없이 나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요르단의 자타리(Zaatari)·아즈락(Azraq) 난민 캠프를 방문하고 온 강도욱<작은 사진> 월드비전 국제구호팀장의 말이다. 2011년 3월 발발한 시리아 내전으로 439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6년째 계속되는 전쟁으로 약 23만명 이상의 시리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 6%(1만2000명)는 삶을 채 꽃피워보지도 못한 아이들이다. 고향을 잃고 맞게 된 또 한 번의 새해, 시리아 난민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무엇일까. 강도욱 팀장에게 난민들의 고된 겨울나기를 들었다. -캠프의 난민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나. “한 달 생활비 20JD(약 3만원)와 매일 똑같은 빵 네 덩이 정도를 지원받아 살고 있다. 오죽하면 다시 시리아로 돌아가 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장 심각한 인프라 문제 중 하나는 위생이다. 자타리 캠프는 배수시설이 없어 비가 내리거나 눈이 녹으면 그 물이 길바닥에 고여 썩는다. 딛고 선 바닥이 해충과 수인성 질병의 원인인 셈이다. 식수도 수십, 수백 가구가 하나의 고무 탱크를 공유하는 형식으로 조달하고 있었다. 월드비전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4년간 꾸준히 식수 위생 사업을 진행해왔다. 아즈락 난민 캠프 내에 정화조 674개,

나눔은 ‘나’를 위해… 혼자 행복한 건 외롭고 재미없죠

‘봉사하는 청춘’을 만나다 탈북 대학생 엄에스더… ‘신개념 꽃거지’ 한영준 ‘수저론’이 한창인 대한민국, 그러나 어떤 곳에선 수저조차 못 물고 태어나는 이들이 있다. 가장 가까운 곳 ‘북한’과 지구 반대편 남미 볼리비아의 빈민촌 ‘뽀꼬뽀꼬’다. 그들에게 ‘나눔’을 보여주는 대한민국 청년들이 있다. 바로 대학생 통일 봉사단을 만든 탈북자 엄에스더(33)씨, 7년째 ‘100원의 후원금 구걸’을 하는 ‘꽃거지’ 한영준(32)씨 이야기다. ◇봉사를 통해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발견한 탈북자, 엄에스더 2010년, 엄에스더(33·한국외대 중어중문학과 4)씨는 두 번 탈북한 끝에 남한 땅을 밟았다. 봉사를 시작한 건 정착 후 한 달도 되지 않아서였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장애인 시설, 독거노인 도시락 배달, 노숙인 무료 급식 봉사 등을 빼놓지 않는다. 왜 그럴까. 엄씨는 중국 옌지(延吉)에서 도피하던 시절을 이야기하다 울먹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눈앞에서 공안에 잡혀가고, 도움을 청할 곳도 없어 삶을 포기하다시피 했어요. 그때 길에서 사지(四肢) 없는 노인이 입에 붓을 물고 글을 써서 파는 걸 보면서, 제 모습이 부끄러워 용기를 냈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에 장애인 시설로 무작정 가 돕고 싶다니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군요. ‘숨어 사는 사람은 좋은 일도 못 하는구나’ 싶어 서러웠죠.” 엄씨는 남한에 도착한 후, 지인에게 소개받은 장애인 시설 ‘엔젤스헤이븐(구 은평천사원)’부터 찾았다. 봉사의 시작이었다. 토요일 새벽부터 일어나 장애인들을 씻기고, 시설 곳곳을 쓸고 닦았다. 주6일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하루 4시간도 못 자는 고된 일상 속에서도 토요일 봉사는 빼먹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봉사는 남한

우리가 몰랐던 그들 마음속 숨겨둔 이야기

편견… 우리가 몰랐던 사람들 우리는 편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익숙치 않은 모습을 보면 손가락질 하고, 소수의 의견을 무시하곤 합니다. 에이즈 환자, 고령지 예술인, 아마추어 작가, 여성 택시기사 등 우리가 접하지 못한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못 읽는다고?’ ‘청각장애인은 듣지 못할 뿐, 글 읽는 건 문제없을 거야’…. 보통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일반적 생각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떨까. 청년 기자들이 만난 우리 이웃 중에는 편견과 통념을 깨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이가 많았다. 편집자 주 #1 “안마사 말고 교육자 되고 싶어” -중도 시각장애인 김태연씨 김태연(43)씨가 시각장애 1급 진단을 받은 것은 28세 때. 설상가상으로 백내장도 진행됐다. 형광등 불빛이 숟가락에 반사되는 것도 견디기 어려웠다. 부모님과 같이 살 수가 없었다. 창문에 선탠지를 바르고, 암막 커튼을 치고 혼자 4년을 살았다. 실로암 복지관의 문을 두드린 것은 ‘할 일’을 찾기 위해서였다. “시각장애인도 대학에 갈 수 있어요.” 복지관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동료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김씨는 사범대에 진학해 영어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시각장애인이 되기 전, 학습지 선생님으로 활동했었던 경력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김씨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이화여대 영어교육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교재’ 문제였다. 학기 초가 되면 비상이다. 김씨는 “점자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거나 볼 수도 있지만, 후천적으로 시각장애가 발생한 경우에는 점자를 읽을 수 있는 분들이 정말 적다”고 했다. 실제 점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시각장애인은 전체 시각장애인의 5% 정도(2014년 기준). 많은

어른들은 알까요, 우리도 ‘평범한 꿈’ 꾼다는 것을

불안… 위기에 몰린 미래세대 가정 폭력·학교 따돌림 벗어나도 가출로 인한 또 다른 위기 생겨 소년원 출원자·미혼모 청소년 등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돼야 “어른들은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비단 노래 가사만이 아니다. 사회에서 낙인찍히고 배제된 소년원 출원자, 미혼모 청소년, 탈학교 비활동 청소년, 수감자 자녀들. 이들을 위기로 내몰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어른들의 잘못일지 모른다. 기성세대는 무엇을 놓친 걸까. 위기에 놓인 미래세대에게 직접 물어봤다. “소년원은 또 다른 ‘무법천지’죠.” 정현성(가명·17)군은 6년 전 가출 후 세 번이나 소년원에 갔다 왔다. 양아버지의 잦은 폭행을 피해 가출한 것이 방황의 시작이었다. 양아버지는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건 예사고 아침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야구 방망이로 구타했다. “쇄골이 골절되기도 하고 몸에 멍이 없어질 날이 없었죠. 경찰에 여러 번 신고도 해봤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죠.”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건 좋았지만, 길거리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또래 아이들과 끊임없이 도둑질을 저질렀다. 결국 경찰에 덜미가 잡혀 2010년 소년원에 처음으로 수감됐다. 하지만 소년원에서 갈수록 폭력성만 커졌다. 고참 문화 때문이었다. “한방을 쓰는 열다섯 명가량 사이에는 철저히 상하 계급이 나뉘었죠. 심지어 옷깃으로 신분을 표시했어요. 대장은 감시와 CCTV에서 벗어난 사각지대에서 이유 없이 가혹한 폭행을 하거나 시키죠. 그러면 당한 애들이 새로 들어온 애한테 복수를 하면서 폭력이 계속 되풀이됐죠.” 그는 소년원 내에서 말썽을 피워 3개월 동안 이송됐던 한길정보산업학교(제주소년원)에서 “진짜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엄마의 편지도 거기서

활짝 열어주세요, ‘다름’ 향해 닫혀 있는 마음의 門

소외… 한국이 낯선 사람들 제3국서 출생한 ‘중도입국자녀’, 탈북 청소년으로도 분류 어려워 다른 인종·출생의 편견 없이 마음의 문 열고 다가와 줬으면 법무부가 발표한 ‘2014년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 연보’에 따르면 국내 출·입국자는 6000만명을 넘어섰고, 국내 체류 외국인은 179만7618명으로 전체 인구의 3.5%를 차지했다. 한국 사회에 터를 잡은 이주민들, 그들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는 어떠할까. 우리 주변 이웃들의 솔직한 목소리를 담았다. “저는 영화감독이 될 거예요.” 지난해 말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인 여명학교에서 만난 김화령(22)씨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가장 인상 깊게 본 영화로 ‘올리버 트위스트’를 꼽으며, “외로움, 고독, 죽음 등 인간 내면 깊숙한 부분의 감정과 상처를 매만지고 싶다”고 했다. 연신 밝은 표정으로 꿈을 이야기하던 그녀에게 새해 목표를 묻자 급격히 얼굴이 굳어지더니 이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제가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영어도, 수학도 정말 어려웠는데, 포기하지 않고 만날 책을 붙잡고 살았어요.” 옷소매로 눈가를 매만지던 그녀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지원한 대학 6곳에서 모두 낙방했기 때문. 그녀는 “남한 아이들과 실력 차이가 나는 걸 아니까 정말 죽도록 열심히 했건만, 도저히 경쟁이 안 되더라”고 했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걱정이다. 화령씨는 “새해에는 우리를 위한 제도가 나올까요”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탈북 학생들의 경우 특별전형으로 여러 개 대학에 합격하고 골라서 다닐 정도인데, 왜 화령씨는 등록금 지원은커녕 대학 문을 두드릴 기회조차 없었을까. ‘입국의 비밀’ 때문이다. 화령씨처럼 탈북 어머니를 따라 제3국에서 국내로 들어오는 아이들을 ‘제3국 출생 북한이탈주민자녀’

소방관 제복은 壽衣… 일하다 다쳐도 국가 지원은 하늘의 별 따기

부산 해운대소방서 중동 119 안전센터 노재훈 소방관 인원 모자라 3교대도 어려워 7~10월엔 종종 24시간 근무 부산의 한 색소 회사. 신고를 받고 출동한 현장은 참담했다. 인화성 물질인 색소 가루에 불이 옮아 붙으면서 화마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었다. 소방 호스로 물을 뿌렸지만 오히려 색소 가루가 떠오르면서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찔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화재 진압용 물줄기가 일으킨 바람에 날린 색소 가루가 소방관의 장화와 옷, 얼굴을 뒤덮었다. 눈·코·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독한 색소에 숨을 쉬는 게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호스를 놓을 수는 없었다. 고성능 화학차가 도착해 소화 거품을 쏟아낸 지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불은 꺼졌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퇴직을 고민했던 소방관은 결국 방화복을 벗지 못했다. 올해로 23년째 화재 현장을 뛰고 있는 노재훈(47·사진) 부산 해운대소방서 중동119 안전센터 소방관의 이야기다. “1993년 9월 경북 문경소방서에서 소방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부산 사하소방서에 있을때는 사고가 워낙 많이 나서 2시간 이상 진압해야 하는 화재 현장을 하루에 7차례 이상 뛰기도 했어요. 요새는 건물에 소방 시설도 잘 갖춰져 있고 안전 의식도 높아져서 화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대신 안전사고나 구급 현장에 많이 출동하는 편이죠. 24시간 센터를 운영해야 하는데, 중동은 인원이 많지 않아서 8명씩 구성된 3개조가 맞교대를 서고 있어요. 원래대로라면 3교대를 해야 하지만 근무자 중 누군가가 휴가나 교육을 가게 되면 인원에 공백이 너무 크니까 맞교대를 설 수밖에 없습니다. 인근

직업에 貴賤 없다? 매일 무시당하는 게 우리 일이죠

노동… 외면 당한 삶의 현장 병동 청소하다 오염된 주삿바늘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찔려요 OECD 28개 국가 중 ‘여성이 일하기 좋은 나라’ 꼴찌(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 2015), 최저임금 이하 소득 노동자가 7명 중 1명꼴로 가장 많은 나라(OECD, 2015). 우리나라의 부끄러운 ‘노동 현실’은 국제사회 성적표에서도 여과 없이 드러난다. 지난 한 해 일한다는 이유로 고통받아야 했던 근로자들이 현실을 짚어봤다.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병실에 무시하고 들어가려는 보호자에게 ‘그러면 안 될 텐데요’라고 했더니 바로 욕설이 날아오더군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조용히 뒤로 돌아 나오는 것뿐이었어요. 하는 일이 청소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사람을 멸시하는 그 눈빛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적응하기 힘드네요.”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10년째 청소일을 하는 윤석현(가명·61)씨. 그는 일할 때 인간적 존중을 받기 어렵다고 했다. 윤씨는 “맨 처음 청소를 시작했을 때는 사람들의 무시하는 눈길이 어찌나 낯설고 무섭던지 3개월 동안 8㎏이 빠졌다”고 말했다. 그는 병동을 청소하다 일주일에 서너 번씩 오염된 주삿바늘에 찔린다. ‘사용한 주사기를 지정된 쓰레기통에 버려달라’는 그의 부탁은 1년차 인턴에게도 제대로 가닿지 않는다. “쓰레기통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아무 데나 주사기를 버리는 의사 선생님들이 있어요. 특히 1년차 인턴 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요. 한번은 용기를 내서 조심스레 ‘주사기만이라도 쓰레통에 넣어달라’고 했더니 ‘뭐야, 재수없어’라며 눈을 흘기더군요.” 사용한 주삿바늘에 찔릴 때마다 윤씨는 자신이 청소한 병실의 쓰레기를 검사실로 가져가야 한다. 쓰레기에서 감염균이 나오든 그렇지 않든 검사를 받는 것이

[Cover Story] 나는 대한민국 1%입니다

[Cover Story] 더나은미래가 만난 50人의 특별한 이웃 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거인병으로 쓰러진 나를 일으킨 건 나눔” 5152만9338명.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 이웃의 숫자입니다(2015년 12월 기준). 아파트에선 경비원 아저씨, 회사에선 청소부 아줌마, 식당에선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마주칩니다. 요즘엔 얼굴색이 다른 이들도 지하철에서 자주 보입니다. 이들이 ‘나와는 다르다’고 생각되지는 않나요. ‘더나은미래’는 청년 기자들과 함께 ‘좀 다를 것 같은’ 우리 이웃 50명을 만났습니다. 거인증을 앓는 전(前) 농구 국가대표 김영희 선수의 이야기를 커버 스토리에 담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노동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 한국이 낯선 사람들, 놓아버리기엔 너무 안타까운 미래 세대를 찾아갔습니다. 더불어 행복한 삶을 위한 1%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입니다. 편집자 주 “너무 커서 무섭죠?”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키 205㎝. 국내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이자 전 국가대표인 김영희(52·사진)씨가 악수를 청하며 건넨 첫 인사였다. “우리 동네에선 ‘거인 아줌마’로 불려요(웃음). 처음엔 아이들이 매일같이 저희 집 앞에 몰려와서 ‘거인, 나와라~’ 하고 놀려댔어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집으로 아이들을 불러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했죠. ‘아줌마 착한 사람이야. 농구선수 아줌마야. 아줌마 놀릴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프다. 앞으로 아줌마 안 놀리면 나갈 때마다 맛있는 것 줄게’ 하고요. 그때부터 주머니 가득 사탕, 과자를 넣고 다녀요. 이젠 절 모르는 사람들이 ‘거인이다~ 남자야? 여자야?’ 하고 수군대면, 아이들이 먼저 나서서 ‘아니야, 마음씨 착한 거인 아줌마야. 농구선수 아줌마야’라고 말해줘요. 얼마나 예쁘고 고마운지 몰라요.” 김씨는 80년대 명실상부한 농구계

“다시 일어섰습니다… 나의 전부인 나무, 가족 위해…”

현대차그룹 기프트카 시즌6 네 번째 주인공 박동서씨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2년을 매일같이 술만 마시며 지냈죠. 참 나쁜 남편, 나쁜 아빠였는데도 아내는 그동안 가사 도우미를 하며 묵묵히 가장 역할을 소화했습니다. 어느 날 거실에 나갔는데, 가족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많이 울었어요.” 열일곱 살 때부터 원목 가구와 목공예품을 만들어온 박동서(49)씨는 요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 ‘기프트카 시즌6’의 네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됐기 때문. 기프트카는 저소득층에게 창업용 차량을 지원하는 현대자동차그룹의 대표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20년간 목공 일을 해온 박씨에게 나무는 삶 그 자체였다. 목공 기술 덕에 번듯한 인테리어 가게 사장님이 됐다. 하지만 2003년 1월, 박씨의 행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른 새벽, 일터로 나서다 교통사고로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2년 방황기를 보낸 끝에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은 박씨는 홀로 재활훈련에 돌입했다. 발목에 모래 주머니를 차고 집 근처 아차산에 오르기를 1년, 마침내 그는 혼자 걸을 수 있는 두 다리를 갖게 됐다. 재활에 성공한 박씨는 다시 나무를 손에 잡았다. 지난 경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2012년부터는 경기구리지역자활센터 ‘조각나무사업단’의 공장장까지 맡게 됐다. 하지만 그의 재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아내와 세 딸에게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자신의 꿈을 담은 인테리어 회사를 다시 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지난 3년간 정말 열심히 창업을 준비했어요. 고객층도 발굴하고, 공장장으로 있던 구로자활센터와 기술 제휴도 맺었죠. 하지만 원목 운반부터 제품 배송, 지역 행사 참여까지 회사를 실제로 운영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