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귤 껍질까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생협’의 경쟁력

한국 로컬푸드단체 소비자생활협동조합 ‘생협’

“껍덕째 먹어마시(껍질째 먹어도 됩니다).”

감귤 수확에 여념이 없던 고임행(78) 할머니가 껍질째 쪼갠 귤을 입에 넣어 보였다. “맛이 쓸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영양분은 귤 껍덕에 더 하영있수다(더 많아요)”라며 웃음을 지었다. 10년째 아들네와 함께 제주시 애월읍 수산리에서 친환경 감귤농사를 짓고 있는 고임행 할머니는 처음 만난 기자에게도 친환경 귤 자랑을 했다. 할머니네 밭에서는 오리와 돼지가 잡초를 없애고 ‘천연 비료’까지 배설해 농약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귤을 내놓는 일이라 보람이 있다.

생협 조합원들에게 친환경 귤을 공급하는 고임행 할머니가 귤 수확에 한창이다.
생협 조합원들에게 친환경 귤을 공급하는 고임행 할머니가 귤 수확에 한창이다.

고 할머니네를 포함, 200여 생산자 가구가 아이쿱(iCOOP)생협 제주 생산자회 ‘참맑은영농조합’에 속해 있다. 생협은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의 준말로 소비자가 스스로 생활 안정과 생활문화의 향상을 위해 출자하여 생활물자를 구매하는 협동조합조직을 말한다. 이들 가구들에 ‘생협’은 자식처럼 키운 친환경 농작물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좋은 거래처다. 13년 전 제주도 감귤 농가에 친환경농업 바람을 일으킨 조합대표 김진수(49)씨는 “농약을 쳐 매끈하고 선명한 감귤색 껍질의 일반 귤에 비해 우중충하고 크기도 작은 친환경 귤은 일반 시장에서 오히려 낮은 평가를 받는다”며 “생산자를 이해하고 친환경농법을 이해하는 생협 사람들을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울산에 사는 이윤단(43)씨가 그런 ‘고마운’ 생협 소비자 조합원이다. 중학교 3학년인 아들의 아토피 때문에 더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 생협에 가입한 윤단씨는 3년 전 제주도 생산자 농장에 직접 방문했다. 윤단씨는 “아들의 아토피를 낫게 해준 고마운 생산자들께 해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작업복을 싸들고 농장으로 찾아갔다”며 “직접 생산과정을 보니 생협 물건을 더 신뢰하게 됐다”고 했다. 윤단씨는 그 후 여기저기 생협을 홍보하고 다닌다.

대기업 중심의 유통구조가 확고히 자리 잡은 요즘, 생산자와 소비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생협은 어떤 의미일까. 두레생협 김영주(57) 대표는 “유통대기업이 유기농산물을 취급할 때는 생산비를 적게 줘 이익을 늘리는 것에만 집중한다”며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고, 소비자에게는 좋은 제품을 주어 서로의 마음을 잇는 것이 생협운동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참맑은영농조합’ 강경남(42) 사무국장도 “가끔 일이 힘들 때 얼굴을 아는 소비자를 떠올리면 다시 정성껏 농사를 지을 마음이 생긴다”며 “농사가 잘 안됐을 때는 이걸 보내야 하나 싶어 괴롭다”고 말했다.

생협은 시장가격의 등락과 상관없이 생협 회원들의 공급량과 수요를 기준으로 가격을 결정한다. 전년 가격을 기준으로 올해 늘어날 소비자 수를 감안해 가격과 공급량을 미리 정하기 때문에 생산자 소득도 소비자 가격도 일정하다. 강경남 국장은 “10년 가까이 생협과 거래하면서 이전 해보다 낮은 수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생산자 농가들은 농작물을 잘 재배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아이쿱 생협연구소 정원각(49) 국장은 “농산물의 가격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투기수요 때문”이라며 “생협 거래로 이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처럼 채소와 과일 작황이 좋지 않아 가격이 폭등할 경우, 생협의 소비자가는 경쟁력이 있다. 올해 제주귤의 생산지 가격은 킬로그램당 1300~1500원 선으로 생협과 일반 공판장가격이 비슷하다. 하지만 소비자가는 생협의 유기농 귤이 한 박스(5kg)에 1만4000원인 데 반해, 생협을 거치지 않은 유기농 귤은 2만3000원에서 4만5000원 선이다. 지난달 배추가격이 폭등해서 포기당 1만원 선을 상회할 때에도 생협은 3000원 선을 유지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농작물의 가격이 낮아질 때에는 생협의 제품이 상대적으로 비싸진다. 한살림의 김민경(54) 대표는 “올해 배추가격이 올라 싼 가격에 배추를 사려는 생협조합원이 좀 늘었는데, 배추가격이 폭락할 때도 생산자를 생각해 상대적으로 비싼 배추가격을 감당하려는 조합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생협의 수익과 조합비는 지역의 아동이나 노인을 돌보고 지역공동체를 만드는 데도 쓰인다. 현재 한국에는 180여개의 단위 생협과 37만 세대에 달하는 생협조합원들이 있고 매출액은 4680억원 규모다. 4인 가족 기준으로 150만명 정도가 생협식품을 소비하는 셈이다. 전체 가구의 2.2%, 식품시장 규모의 0.5% 수준이다. 지난 3월 생협법의 개정으로 농산물 이외의 생활용품도 판매할 수 있도록 사업범위가 확대되고 농협처럼 공제사업이 가능하게 되면 생협의 역할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정원각 국장은 “농산물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생필품을 모두 다루는 스위스는 국민 750만명 중 조합원이 450만명이고 2009년 매출이 50조에 달한다”며 “개인화된 소비자와 생산자는 거대한 조직을 갖춘 유통업자에 비해 약자이지만, 생협의 규모가 커지면 유럽처럼 생협이 국가와 시장을 견제하는 역할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상_그래픽_생협_한국3대생협_2010생협의 조합원이 되고 싶은 분은 아이쿱생협(www.icoop.or.kr, 1577-0014), 두레생협(www.dure.coop, 02-3283-7290), 한살림(www.hansalim.or.kr, 02-3498-3600)에 문의하시면 됩니다.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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