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 아저씨 토스트 값, 제가 미리 냅니다” 파란 쪽지로 나눈 마음

미리내 가게 ‘토스트와 주먹밥’
‘맡겨놓은 커피’에서 시작된 나눔운동… 미국·영국 이어 지난해 3월 국내서도 시작
타인 위해 미리 음식값 내는 기부운동 확대… 헌혈증·폐휴대폰 모아 소아암 환아 돕기도

‘베이컨 치즈 토스트 1개, 미리 내고 갑니다.’ ‘1000원. 적은 돈이지만 보태고 싶어요. 맛있게 드세요.’

지난달 8일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위치한 음식점 ‘토스트와 주먹밥’에 들어서자, 한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쿠폰이 눈에 들어왔다. 100원, 1000원, 2만원 등 파란색 쿠폰에 적힌 금액은 천차만별이었다. 가게를 다녀간 수백 명의 메시지도 함께 있었다.

①명지대 삼거리 인근에서 ‘토스트와 주먹밥’ 가게를 하고 있는 최정원 사장은 미리내 홍보맨으로 불린다.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음식, 음료값을 지불하는 기부 캠페인인 ‘미리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최 사장의 모습. ②헌혈증을 가져온 손님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고 모인 헌혈증은 소아암 환아에게 전달한다. ③토스트와 주먹밥의 모든 테이블 위엔 메뉴판과 함께 미리내 운동 안내 책자가 놓여있다.
①명지대 삼거리 인근에서 ‘토스트와 주먹밥’ 가게를 하고 있는 최정원 사장은 미리내 홍보맨으로 불린다.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음식, 음료값을 지불하는 기부 캠페인인 ‘미리내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최 사장의 모습. ②헌혈증을 가져온 손님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하고 모인 헌혈증은 소아암 환아에게 전달한다. ③토스트와 주먹밥의 모든 테이블 위엔 메뉴판과 함께 미리내 운동 안내 책자가 놓여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돈을 내고 간, 나눔의 흔적입니다.”

미리내 가게 홍은동 1호점인 ‘토스트와 주먹밥’ 사장 최정원(53)씨의 말이다. 2010년 명지대 인근에 토스트 가게를 연 그는 지난해부터 ‘미리내 가게’ 간판을 달았다. ‘미리내’란 돈을 미리 낸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미리 음식·음료값을 지불하는 기부 캠페인이다. 100여년 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시작된 ‘맡겨놓은 커피(Suspended Coffee)’운동에서 출발했는데, 미국·영국·캐나다·호주 등 전 세계로 퍼졌다. 지난해 3월, 국내에도 미리내운동본부가 설립됐고 1년 6개월 만에 미리내 가게는 무려 320곳으로 확대됐다. 미리내운동본부를 카카오스토리에서 친구로 등록한 사람도 총 16만명에 달한다.

10평 남짓한 이 가게의 모든 테이블 위엔 메뉴판과 함께 미리내 운동 안내 책자가 놓여 있다. 벽엔 미리내 홍보 포스터, 신문 스크랩 등이 곳곳에 붙어 있다. 가게 앞에 놓인 미리내 간판엔 매일같이 미리 지불된 금액과 메뉴가 공개된다. 누구든지 와서 그만큼 무료로 식사할 수 있다. 최씨는 “얼굴·나이·이름도 모르는 누군가를 위해 선의를 베풀면, 필요한 사람이 쓸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좋았다”고 참여 계기를 설명했다.

처음에는 미리내 운동이 워낙 생소한 개념이라, 그 취지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최씨는 “예전에 2800원짜리 토스트를 주문한 초등학생이 ‘거스름돈 200원을 미리 내겠다’고 하고 돌아갔는데, 자녀가 사기당한 걸로 오해한 어머니가 가게로 직접 찾아오신 적이 있다”면서 “벽에 붙은 쿠폰을 보여드리며 미리내 운동과 취지를 설명드렸더니, ‘미안하다’며 나중에 2만원을 미리 내고 가셨다”고 전했다. 그는 “아이의 나눔이 어른의 생각과 마음을 바꿔놓고 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미리내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가게에 오는 사람들과 소통이 늘었습니다. 미리내를 설명하고, 참여하는 사람들과 관련 사연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 냄새 나는 가게가 됐지요. 주로 인근 초·중·고·대학교 학생들이 배고플 때나, 재미 삼아 오곤 하는데 신기하게도 5명 중 최소 1명은 미리내에 참여하게 됩니다.”

기억에 남는 손님도 많다. “가게에 자주 오는 중학생이 있어요. 메뉴별로 200원, 400원, 700원씩 잔돈이 남으면 항상 미리 내고 갑니다. 그 학생에게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있어요. ‘나중에 커서 미리내 가게 사장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더 잘해야겠다는 부담감과 고마움이 컸죠.”

최씨는 지난해 미리내 운동을 알리는 팟캐스트를 진행했다. 하루 2시간씩 30회에 걸쳐 미리내 사연을 알린 덕분에, 전국 단위의 미리내 팬도 늘어났다. 그가 SNS에 올리는 글, 사진을 보고 ‘계좌번호부터 달라’는 행동파도 많다. “전화로 토스트 10개, 주먹밥 10개를 주문한 뒤 1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안 되는 손님이 있었습니다. 폐지를 줍는 분, 경비 아저씨 등 주변 분들께 음식을 나눠드린 뒤 페이스북에 사연을 소개했는데, 2시간 뒤에 페이스북 댓글로 ‘멀어서 못 가는 대신 토스트 10개, 주먹밥 10개 비용인 3만7200원을 미리 내겠다’며 계좌로 입금해주신 분이 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분들이 미리내 운동에 동참해주고 계십니다.” 최씨가 ‘미리내 홍보맨’으로 불리는 이유다.

‘토스트와 주먹밥’에선 색다른 미리내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헌혈증과 중고 휴대폰을 가져오면 원하는 음식으로 교환해주는 것. 계기는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씨는 SNS를 통해 알게 된 소아암 환아를 위해 헌혈증 모으기 운동을 진행, 헌혈증 100여장을 환아 가족에게 전달했다. 비록 그 환아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지만, 이후로도 그는 헌혈증을 기부하는 이들에게 원하는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 중고 휴대폰은 강릉에 있는 미리내 가게 ‘가온 텔레콤’으로 보낸다. 가온 텔레콤은 중고 휴대폰 부품을 분리·청소한 뒤 재조립해 필요한 독거 노인들에게 기부하고, 폐휴대폰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원하는 이들의 선불폰 요금을 내주는 미리내 가게다. 최씨는 “매달 기부되는 중고 휴대폰만 박스로 한가득”이라고 덧붙였다. 미리내 가게들의 협력이 또 다른 나눔을 낳고 있는 것.

얼마 전 최씨는 가게 부엌 옆 자투리 공간에 팟캐스트 방송실을 만들었다. 컴퓨터, 마이크, 오디오 등 각종 음향장비도 구비하는 중이다. 본격적인 미리내 가게 홍보를 위해서다.

“미리내 가게 사장님들을 한 분씩 모셔서 그분들의 사연을 팟캐스트로 소개하고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전국의 미리내 가게를 돌면서, 사람들과 더 재미있는 방법으로 소통하는 미리내 아이디어를 계속 발굴하고 싶습니다. 미리내 운동은 그만큼 손쉽게 누구든 참여할 수 있는 기부 캠페인이거든요.”

※이 글은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와 현대해상, ARCON이 진행하는 소셜에디터스쿨 ‘청년, 세상을 담다’ 인터뷰 실습 과정에서 우수 기사로 선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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