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8일(월)
[농업의 미래, 미래의 농업] 냉면 한 그릇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냉면은 메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적당히 쫄깃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슴슴한 국물에 올곧음을 잃지 않고 질긴 듯 무심하게 끊어지는 면발은 ‘내가 뭘 씹은 거지?’ 하는 의문이 들 때쯤 까칠한 식감이 혀를 감싸고 쌉쌀한 향이 입안에 퍼진다. 더러 순 밀로 만들어 허무하게 끊어져 동치미 육수와 함께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냉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우리 기억 속의 냉면은 대체로 그러하다.

한국인의 냉면부심은 끝이 어딜지 모르게 치솟는다. 실향민의 음식에서 서민의 외식으로 그리고 청년의 부심으로 진화를 거듭하면서 냉면 가격은 품위를 논할 수 있을 만큼 올랐다. 2016년 이미 전체 냉면 시장 규모는 1000억 원을 넘어섰고, 간편식 냉면 시장도 700억원에 달했다. 이와 함께 냉면계도 장인의 숨결이 넘실대던 낭만의 시대가 저물고 비정한 브랜드의 각축장으로 바뀌어 갔다. 오랜 세월 부모님과 함께했던 손맛과 가문의 비법은 자식 대에 이르러 레시피와 품질관리로 옷을 갈아입었다.

스타 셰프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요리의 수준은 결국 식재료로 수렴한다.’ 평양냉면은 돌아서도 잊히지 않는 슴슴한 국물 맛으로 기억되지만,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메밀이다. 면발이 별볼일없으면 엠에스지 국물에도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게 이 세계의 냉정함이다. 냉면계도 오른 가격에 걸맞게 식재료 경쟁에 돌입한다. 그런데 주재료인 메밀은 국내 생산량이 소비량의 절반에 불과하다. 2800톤의 수입 메밀 중 중국산이 70%를 넘어간다. 육수 경쟁이 막을 내릴 때쯤 냉면 업계에서는 ‘이야기가 있는’ 국산 메밀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펼쳐진다. 그러나 왜소한 메밀 시장은 종자, 농기계, 가공시설 등 산업기반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메밀의 주산지는 어디일까? 아마도 대부분은 강원도 봉평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메밀의 최대 생산지는 제주이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메밀의 3분의 1이 제주산이다. 그렇지만 시중에서는 제주 메밀을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 봉평에서 가공되어 제주라는 이름을 잃고 국내산으로 팔리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을 잃은 농산물은 냉면이 만들어내는 가치로부터도 멀어진다.

반면에 울릉도의 메밀은 그 생산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한 음식점에서 브랜드화하면서 차별화된 가치를 만들어낸다. 고객들은 냉면을 먹으면서 울릉도의 자연경관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메밀밭을 떠올리고 안개 자욱한 신비의 섬과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우리는 농산물이 칼로리를 공급하던 시대를 지나 각 지역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농촌과 도시와의 거리는 멀어졌지만 정서적 유대감까지 멀어진 건 아니다. 그 농산물을 생산한 토양과 농부의 이야기 속에서 도시와 농촌은 다시 이어진다.

전남 보성군의 득량만 간척지가 내려다보이는 한 비닐하우스에서는 한겨울에도 벼가 자라고 있다. 이미 추수할 만큼 여물었지만 아직 시중에서 구할 수는 없다. 종자로 개발되는 품종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야 우리 밥상에 오를지도 모른다. 보성특수농산의 정병찬 대표는 ‘농산물의 이야기’가 가지는 힘을 일찍부터 실감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쌀을 생산해서 그 가치를 아는 고객을 찾아간다. 그런데 한 가지가 부족했다. 자신만의 품종이었다. 지금까지 벼 품종은 국가가 육종해서 보급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품종은 이곳 보성의 득량만 간척지에서만 재배된다. 지역의 토양과 기후에 맞게 디자인된 쌀은 아밀로스의 함량을 10% 내외로 조절하여 적당한 찰기와 함께 소화를 쉽게 하고, 밥 향은 풍부하게 만드는 게 목표이다.

제주의 메밀도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농민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생산자 조직을 만들었고, 농촌 이야기를 발굴해 온 서은경 작가는 간결한 문장과 정감 넘치는 그림으로 도시가 이해할 수 있는 농촌을 그려낸다. 농촌진흥청에서는 제주를 위한 메밀 품종을 개발해서 지원할 예정이다. 우리는 농촌의 문제를 어렵게만 풀려고 하지 않았을까? 만약 이 글의 독자들이 냉면 한 그릇 할 때 메밀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다면 아직 농촌에서는 희망이 자랄 수 있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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