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만드는 시민들] ‘하준 엄마’ 고유미, ‘정치하는엄마들’ 장하나씨
경사진 주차장 차 미끄러짐 사고로 아들 잃어 국민청원·편지 호소에 정부가 대책 내놨지만
사고 후 지금까지 안전 시설 달라진 게 없어 ‘정치하는엄마들’과 힘 합쳐, 법안 통과 목표
“하늘에서 하준이와 다시 만나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너를 아프게 한 그런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에 머리가 하얗게 새버린 엄마는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이 있다고 했다. 혼자서 외롭게 시작한 싸움이었지만, 이제는 동지가 생겨 버틴다고 했다. ‘하준이 엄마’ 고유미(37)씨 이야기다.
고씨는 2년 전 차량 미끄러짐 사고로 다섯 살 최하준군을 잃었다. 그날 이후, 그는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사고로부터 다른 아이들을 지키기 위한 법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이유는 하나다. “엄마니까.” 고씨에게 힘이 돼 주는 사람도 엄마들이다.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이 고씨와 함께 입법 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 13일 고씨와 함께 만난 장하나(42) 정치하는엄마들 활동가는 말했다. “엄마 고유미, 엄마 장하나는 힘이 없어요. 하지만 ‘엄마들’이 뭉치면 다릅니다.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어요.”
“같은 사고로 아이가 둘이나”… 엄마는 뭐라도 해보기로 했다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2017년 10월 1일 고씨는 남편과 하준군, 세 살배기 딸과 함께 서울랜드를 찾았다. 남편이 트렁크에서 카메라를 꺼내는 사이에 SUV 차량이 고씨와 하준군을 뒤에서 들이받았다. 추돌 차량의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경사를 따라 수십m를 굴러 사람을 덮친 것이다. 이 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하준군은 1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창자가 끊어지는 아픔 속에서도 고씨는 한 달여 만인 11월 6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경사가 있다는 안내문이나 방지턱만 있었어도 사고를 막을 수 있었다’며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했다.
“하준이를 봉안한 곳에 해인이도 있었어요. 2016년 4월 차량 미끄러짐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라는 걸 알게 됐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당시 저는 임신 중이었고, 할 수 있는 거라곤 글을 쓰는 일뿐이었죠.”
고씨의 청원에 동의한 사람은 청와대 답변 기준인 20만명에 못 미쳤다. 모두 합쳐 14만6068명. 고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청와대에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 국회 국토교통위원회·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의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서명해 준 사람들에게 미안해서 뭔가 해보기로 했다. 지치지 않으리라.’ 당시 고씨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남긴 글이다.
정부는 사고 발생 6개월 만에 응답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해 4월 ‘주차장 교통안전 개선대책’을 발표하고 “사고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올린 국민청원에 따른 후속 조치”라고 밝혔다. 정부 대책에는 지자체와의 협의 아래 ▲주차장 관리자에 대한 안전 관리 의무 부여 ▲주차장 합동안전점검 시행 ▲주차장 시설개선 추진 ▲시설 개선 확인·점검 등 방안이 담겼다. ‘경사진 주차장에서 주차제동장치·고임목을 이용한 주차 주의 의무와 처벌 근거를 둔 주차장법 개정안이 금년 내 개정될 예정이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고씨는 정부가 대책을 발표했을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쏟았다. “기대를 뛰어넘는 대책들이 대거 발표됐거든요. 그대로 시행만 됐다면 세상은 더 안전해졌을 거예요. 문제는 지금까지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에요.”
“아이들을 잃고 만들어진 수많은 법, 여전히 국회서 잠자고 있어”
고씨가 정치하는엄마들에 도움을 청한 건 올해 4월이었다. 장하나 활동가는 “고유미님이 건넨 사진을 보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랜드 주차장의 최근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어요. 하준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와 비교해 달라진 게 없었죠. 1만6500㎡(약 5000평) 부지 주차장에 ‘경사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현수막 7개가 걸린 게 전부였습니다. 방지턱이나 스토퍼도 없었고, 고임목도 비치돼 있지 않았어요. 사실상 그대로 방치된 거죠.”
정치하는엄마들은 서울랜드를 소유한 서울시에 “주차장의 경사를 없애는 평탄화 사업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예산이 많이 들어 못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장 활동가는 “정부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한다면서 대책을 내놓고도 이후 어떤 조치도 하지 않았다”면서 “보여주기식 처방에 엄마들은 모멸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주차장법 개정안’도 답답한 상황이다. 정부가 대책을 발표한 지 한 달 만인 지난해 5월 ‘법안의 무덤’으로 불리는 법제사법위원회 제2소위에 발목을 잡혀 논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부는 방관하고, 정치권은 정쟁하는 가운데 차량 미끄러짐 사고는 계속 일어났다. 고씨는 “환멸이 나서 그만하려고 했는데 정치하는엄마들이 법을 새로 만들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지난 7월 9일 고씨와 정치하는엄마들은 이용호 무소속 의원과 함께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날 이 의원은 주차장 관리 주체가 ▲주차장 안전점검을 시행하고 ▲고임목 안내와 설치를 의무화하고 ▲어길 경우 영업정지 또는 300만원 미만의 과징금을 부과하는 내용의 주차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주차장 관리 주체의 의무를 강화한 법안으로 고씨와 정치하는엄마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완성했다. 이 의원은 오는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 이 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장 활동가는 “특수학교 차량 내 CCTV 설치를 의무화하는 ‘한음이법’, 모든 통학차량을 어린이 통학차량에 포함시키는 ‘태호·유찬이법’ 등 아이들을 잃고 나온 수많은 법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며 “아이들의 안전과 관련한 법안들을 모두 묶어 올해 안에 통과시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고씨는 연대를 이야기했다. “정치하는엄마들이 없었다면 벌써 지쳤을지도 몰라요. 어깨를 맞대고 함께 걸으면서 미약하나마 가진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하준이를 지킬 법이 통과된다면 이후에는 정치하는엄마들로 살아보고 싶어요.”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