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9일(금)

블록체인은 어떻게 인도네시아 빈농의 삶을 바꿨을까

블록체인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다

사회 혁신가(Social Entrepreneur)를 발굴하는 국제 비영리단체 아쇼카는 지난 2017년 8월 미국 블록체인 사회적 기업 반큐의 함세 와파 대표를 새 펠로로 발표했다. 1982년부터 3500여 명의 펠로를 선정한 아쇼카가 처음으로 블록체인 전문가를 ‘체인지메이커’로 인정한 것이다. 블록체인이 ‘사회적 기술(Social Tech)’로 각광받는 시대가 열렸다. 세계 곳곳에서 사회적 가치를 만들어내는 도구로 활용된다. 블록체인 덕분에 가난한 농부가 돈을 벌었고, 고국을 떠난 난민은 신분증명서를 받았다. 이 특별한 기술은 지구가 푸른 빛을 되찾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데이터 제공자’는 하라의 블록체인 플랫폼의 핵심 구성원이다. 이들은 농부들로부터 데이터를 수집해 블록체인에 기록하고 기업이나 금융권이 이를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엔진 역할을 한다. 하라는 데이터 제공자들을 ‘농업혁신가(agripreneur)’라고 부른다. 농업(agriculture)과 혁신기업가(entrepreneur)를 조합한 말이다. ⓒ하라

블록체인, 가난한 농부의 영양분이 되다

“인도네시아에는 지구에서 가장 가난한 농부가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는 ‘하라(HARA)’라는 회사가 있죠. 하라는 가난한 농부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놀라운 생태계를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10월 16일 싱가포르국립대에서 제5회 국제쌀대회(IRC)가 열렸다. 기조연설자로 나선 버너 보겔스 아마존 부사장은 농업의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2015년 설립된 블록체인 기업 하라를 주목했다.

하라 데이터 거래
스마트폰만 있으면 누구든 하라의 플랫폼에 데이터를 입력할 수 있다. 하라는 현재 700여명의 데이터 제공자를 통해 농부 2만3000여명의 데이터를 수집했다. ⓒ하라

하라는 인도네시아어로 영양분을 뜻한다. 농부들의 영양분이 되겠다는 의미다. 하라가 하는 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인도네시아 농업 환경을 살펴야 한다. 인도네시아는 농업이 국내총생산(GDP)의 14%를 차지하는 농업국가다. 국민 46%가 농업에 종사하지만, 대부분 가난하다. 2017년 기준 농부의 월평균 임금은 177만루피아(약 15만원)로 전체 평균인 274만루피아(약 24만원)보다 35%나 낮았다. 극빈층의 78%가 농촌에 산다.

하라는 농촌 빈곤의 원인으로 두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금융 소외다. 농부가 은행에서 대출받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다. 신원이 불분명하고, 토지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농부들은 연이율이 90%에 달하는 민간 사채업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1년 수입의 70%를 이자를 갚는 데 쓴다. 둘째 원인은 농산물 유통망의 부재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농협과 같은 안정적인 농산물 판매 창구가 없다. 지역을 독점한 특정 유통업자가 부르는 가격에 ‘제값’ 못 받고 넘기는 것이 현실이다.

하라는 ‘데이터 거래’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데이터 수집가를 양성해 농업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금융권, 농업 관련 회사와 공유한다. 데이터를 제공하는 사람은 경제적인 보상을 받고,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용료를 낸다.

이 생태계는 ‘데이터 제공자’와 ‘데이터 구매자’로 구성된다. 데이터 제공자는 농촌의 청년들이다. 스마트폰을 활용해 농부의 신원, 재배 품목, 경작지의 모양과 면적 등을 블록체인에 기록한다. 은행·보험회사 등 금융권과 비료·유통 업체 등 농업 관련 기업은 데이터 구매자로 참여한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잠재적인 수익원을 발굴할 수 있다.

술라웨시섬에 있는 토조 우나우나 마을의 사례는 하라의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보여준다. 이 마을 농부들은 주로 옥수수를 심는다. 옥수수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수확량이 떨어지는 특성이 있어서 경작할 때마다 새 종자를 심어야 한다. 농부들도 이 사실을 알지만, 2·3세대 종자를 심어 왔다. 새 종자를 살 여력이 없었다. 하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 종자만 보급하면 1㏊(1만㎡)당 수확량을 8t에서 13t으로 늘릴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후 은행과 연계해 농부들에게 대출을 지원했다. 하라와 협력하는 대형 유통업체는 직거개로 농작물을 합리적인 가격에 사들였다. 덕분에 농민들은 이전보다 4~8배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됐다.

하라는 오는 2021년까지 100만명의 농부를 블록체인 생태계에 포함한다는 계획이다. 지난달 기준으로 212개 마을에서 2만3000명의 농부가 참여하고 있다. 데이터 제공자는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700명 정도 활동한다. 하라에 참여한 농부들은 다른 농부들과 비교해 평균 소득이 3배 높고, 데이터 제공자들은 한 달 평균 145만루피아(약 12만5000원)의 부가 수입을 얻고 있다.

 

레바논 트리폴리에 있는 상점에서 암호화폐가 들어 있는 ‘디지털 바우처’로 생필품을 구매하는 시리아 난민. ⓒ에이드테크

에이드테크, 블록체인으로 난민 구호 시스템 구축

시리아 내전이 절정으로 치달은 지난 2015년 12월 아일랜드 기업 에이드테크는 난민 구호에 블록체인을 결합한 최초의 프로젝트를 레바논 트리폴리에서 진행했다.

레바논은 밀려드는 난민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인구 500만명의 레바논으로 흘러 들어온 난민이 100만명이 넘었다. 국제 비영리단체들이 곳곳에 캠프를 꾸려 구호 사업을 벌였지만,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각각의 난민들이 어떤 구호 서비스를 이용했는지, 물자는 얼마나 지원했는지, 현재 가장 시급한 서비스가 무엇인지 통계조차 낼 수 없었다. 또 은행 계좌가 없는 난민들에게 현물을 지원하다 보니 분쟁이 일었다. 난민끼리 돈과 물자를 뺏고 뺏기는 다툼이 계속됐다.

에이드테크는 ‘디지털 신원 증명’을 방안으로 제시했다. 한 번 기록되면 삭제하거나 위조할 수 없고, 기록된 정보는 투명하게 공유할 수 있는 블록체인을 적용한다면 난민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

방식은 간단하다. 난민 100가구를 대상으로 이름과 나이 등 신원을 조사했다. 이후 가구당 5장씩 ‘디지털 바우처’ 카드를 지급했다. 각각의 카드에는 20달러(약 2만4000원) 가치의 암호화폐가 담겼다. 고유한 QR 코드가 부착된 카드는 난민 캠프 인근의 지정된 상점들에서 생필품과 교환하는 용도로 쓰게 했다.

난민 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는 많은 것을 증명했다. 난민들이 언제, 어디서, 무얼 샀는지 블록체인 시스템에 고스란히 기록됐다. 또 카드에 들어 있는 암호화폐를 지정되지 않은 곳에서 쓰려고 한 20건의 ‘부정 사용’ 사례를 적발할 수 있었다. 모든 과정은 에이드테크과 협력한 아일랜드 적십자사가 실시간으로 살폈다.

현재 에이드테크는 유엔개발계획(UNDP) 등 국제기구와 협력하고 있다. 시리아 난민 3만여 명이 블록체인 기반 구호 서비스 혜택을 받고 있다. 나일 데니히 에이드테크 공동 설립자는 “비영리단체와 정부기관 등이 추적 가능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구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며 “기부하는 사람도 기부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확인할 수 있어서 투명하다”고 말했다.

에이드테크의 궁극적 목표는 난민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취약계층의 전 생애를 추적해 맞춤형 구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탄자니아의 임신부와 태아 6000명을 대상으로 디지털 신원을 부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의료 기록의 보존과 추적이 목적이다. 조셉 톰슨 에이드테크 공동 설립자는 “탄자니아에서는 ‘블록체인 아기(blockchain baby)’가 태어나고 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블록체인에 기록된다. 의료진은 이를 활용해 적절한 시기에 예방접종을 하는 등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거둬들이는 아이티 여성. 플라스틱 뱅크 스마트폰 앱만 있으면 달러로 교환 가능한 암호화폐를 보상받을 수 있다. ⓒ플라스틱 뱅크

“플라스틱 쓰레기를 암호화폐로 바꿔 드립니다”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이 최근 발간한 ‘사회적 가치를 위한 블록체인(Social impact for block chain)’ 보고서를 보면 블록체인은 여러 분야에서 임팩트를 만들어 내고 있다. ▲민주주의 확대 ▲지배구조 개선 ▲디지털 신원 증명 ▲금융 지원 ▲기부 투명성 강화 등 다양하다.

캐나다 밴쿠버의 사회적 기업 ‘플라스틱 뱅크(Plastic Bank)’는 블록체인으로 환경 문제를 개선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플라스틱 뱅크는 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한 해양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2013년 페루에서 첫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당시 페루는 매년 바다를 통해 밀려드는 플라스틱 쓰레기로 골머리를 앓았다. 유엔환경총회(UNEA) 보고서에 따르면 플라스틱 쓰레기는 대부분 선진국에서 배출되지만, 피해는 쓰레기 처리 인프라가 부족한 저개발 국가가 떠안는다.

플라스틱 뱅크는 페루 국민의 힘을 빌려 플라스틱 쓰레기를 거둬들이고, 이를 재활용해 되파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가져오면 무게를 재서 돈으로 돌려줬다. 하루 수입이 1달러(약 1200원)에 못 미쳤던 페루의 빈민들은 이를 통해 3~5배의 수익을 올렸다.

다만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됐다. 플라스틱 수거부터 보상까지 모든 과정을 수기로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비효율이 발생한다는 것이 장애물이었다. 더 많은 지역에서 사업을 벌이기 위해서는 비용을 줄여야 했다. 페루 빈민 대부분이 은행계좌가 없다는 점도 문제가 됐다. 대가를 현금으로 지급했는데, 이로 인해 빈민 사이에서 절도·폭력 등 범죄가 벌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플라스틱 뱅크는 글로벌 IT 기업 IBM과의 협력을 통해 문제를 극복했다. 2015년 스마트폰만으로 모든 거래 기록을 남기는 IBM의 블록체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에게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해온 대가로 태양광으로 충전이 가능한 플라스틱 스마트폰부터 지급했다. 보상은 암호화폐로 지급했다. 다만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 가격 변동성이 큰 기존 암호화폐가 아닌 자체 개발한 코인을 썼다. 가격이 달러와 연동돼 있어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게 했다.

대지진 이후 재건이 한창인 아이티는 플라스틱 뱅크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티 전역에 30개가 넘는 자원순환센터를 운영한다. 2000명 이상이 플라스틱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거둬들인 플라스틱만 320만㎏에 달한다.

데이비드 카츠 플라스틱 뱅크 설립자는 지난해 1월 테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블록체인 덕분에 플라스틱 쓰레기(plastic waste)는 사회적 플라스틱(social plastic)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장지훈 더나은미래 기자 jangpr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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