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Cover Story] 우리는 지금 ‘좋은 일자리’ 실험 중입니다

[Cover Story] 좋은 ‘일’이 생긴다

일자리 개선 위한 고민·실천, 사회 곳곳으로 확산
아이 데리고 출근할 수 있는 진저티프로젝트社
야근 잦았던 MYSC, 6주간 주 30시간 근무 파격

지난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진저티프로젝트 사무실. 회의실에 모여 앉은 엄마들이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각자 업무에 한창이다. 재잘재잘 아이들이 노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엄마들의 손가락이 맹렬하게 기획안을 써내려간다. 같은 시각, 회의실 밖에서는 남자아이들이 책상 사이를 줄지어 걸으며 ‘미로 놀이’를 하고 있다. 세 살 이주환·김진, 일곱 살 최예준, 여덟 살 민지홍, 아홉 살 김윤. 다섯 아이는 종종 ‘엄마들의 일터’에 모여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함께 보드게임을 한다. 지홍이가 의젓하게 한마디 한다. “엄마랑 이모들이 일할 땐 귀찮게 안 해요. 여기서 해도 되는 게 뭔지, 하면 안 되는 게 뭔지 잘 알고 있어요. 아, 진이랑 주환이는 빼고요. 아직 아기들이잖아요(웃음).”

지난 26일 오후 진저티프로젝트 직원들이 회사로 아이들을 데려와 함께 일하고 있다. 서현선 대표는 “직원들이 행복해야 조직이 유지된다는 믿음으로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신영 C영상미디어 기자

◇ “아이 맡길 곳 없어 막막한 날, 함께 출근하세요!”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실험들이 우리 사회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다. 진저티프로젝트라는 회사가 진행 중인 ‘직장에 아이 데려와 함께 일하기’도 그중 하나다. 지난 2014년 설립된 진저티프로젝트는 건전한 조직 문화를 연구하고 교육하는 작은 회사다. 구성원 아홉 명이 모두 여성이며, 그중 넷은 아이가 있다. 여성들로만 이뤄진 조직이라 설립 초기부터 ‘일과 육아의 양립’에 대한 고민이 컸다. 엄마들의 직장에 아이들을 데려오게 된 건 회사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자구책이었다.

윤이·진이 형제의 엄마인 홍주은(38) 공동대표는 “결혼해 아이를 낳고 일을 그만뒀다가 여기 와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윤이가 엄마와 떨어지는 걸 너무 힘들어했다”고 말했다. “그때 윤이가 다섯 살이었어요. 사정을 얘기했더니 서현선 대표가 아이를 회사에 한번 데려오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어요. 엄마가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려고 매일 회사에 나가는지 정확히 알게 되면 불안감이 줄어들 수 있다는 얘기였죠.”

효과가 있었다. 엄마 회사를 방문한 뒤 윤이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홍 대표는 “엄마의 상황을 아이 나름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면서 떼쓰는 일이 줄었고, 덕분에 훨씬 편안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다른 직원들도 아이를 맡아줄 곳이 없어 막막한 날에 아이를 데리고 회사로 출근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엄마들끼리 약속을 하고 같은 날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오기도 한다. 안지혜(30) 팀장은 “큰 아이들은 저희끼리 알아서 잘 놀지만, 아무래도 작은 아이들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날도 안 팀장은 세 살 주환이가 무릎에 앉아 어리광을 부리는 통에 업무를 잠시 멈춰야 했다. 홍 대표는 “육아를 하다 보면 돌발 상황이 일어나게 마련”이라면서 “일할 때 아이가 옆에 있으면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아이 생각에 불안해하고 괴로워하는 상황보다는 업무 효율성이 훨씬 높다”고 했다.

◇하루 6시간 근무해보니… 일의 ‘가치’ 깨닫게 되더라

주 30시간 근무가 보편화된 유럽처럼 근무시간을 파격적으로 줄이는 실험도 진행 중이다. 사회혁신 전문 컨설팅 회사 MYSC(엠와이소셜컴퍼니·이하 ‘미스크’)는 지난여름 6주에 걸쳐 ‘주 30시간 근무제’를 시범적으로 시행했다. 미스크 전 직원은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5시까지 일했다.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6시간을 근무했지만, 급여는 전과 똑같이 지급됐다.

김정태(41) 미스크 대표는 “당시 주 52시간 근무제가 막 시행되면서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얘기가 한창 나오고 있었는데, 우리도 컨설팅 회사 특성상 야근이 잦은 편이라 개선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직원들과 함께 지난 3년간의 근무 패턴을 분석해 비수기와 성수기가 있다는 걸 알아냈다. 비교적 일이 적은 때가 여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바로 주 30시간 근무제 실험에 나섰다.

직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6주가 끝난 뒤 설문 조사를 했더니 “부모님과 처음으로 저녁 드라마를 함께 봤다” “오후 5시의 지하철은 천국이더라” “짧은 시간에 효율적으로 일을 하다 보니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생각하면서 일하게 됐다” 등 긍정적인 피드백이 쏟아졌다. 반면 “시간 내에 일을 마치지 못해 집에 가서 일했다” “외부 미팅이 잦은 리더급의 경우 5시 퇴근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미스크는 내년 1월에 2차 테스트를 진행해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이후 1년 중 비수기 5개월은 ‘주 30시간 근무제’를 시행할 계획이다. 직원들의 급여와 복지는 그대로 유지된다.

일부에서는 일자리 실험들이 안고 있는 한계와 리스크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조직마다 규모와 특성,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태 대표는 “미스크는 예전부터 유연근무제와 재택근무제를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 30시간 근무제 도입이 쉬웠지만, 준비 없이 갑자기 적용할 경우엔 혼란이 생길 수도 있다”면서 “너무 위험하지 않게 실험실을 꾸며야 한다”고 조언했다. 서현선(41) 진저티프로젝트 공동대표는 “좋은 일자리 실험들은 우리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며 “실험에는 언제나 리스크가 따르지만, 계속 보완해나가다 보면 ‘길’을 찾게 될 것”이라고 했다.

[김시원 더나은미래 기자 blindletter@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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