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 가능 에너지 고작 1%. 삼성전자는 석탄화력 에너지를 바꿔라.’
지난 1월 18일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위치한 삼성전자 매장. 주황색 조끼를 입은 이들이 우르르 등장하더니 순식간에 매장 곳곳을 바꿔놨다. 건물 외벽 제품 광고엔 ‘재생 가능 에너지 쓰지 않는 삼성, 혁신을 보여줄 때’라는 포스터가 걸렸다. 매장에 비치된 갤럭시 제품에는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촉구하는 화면이 띄워졌다. 제품 옆에 비치된 종이 설명서는 ‘갤럭시는 실패했다’는 ‘에너지 설명서’로 교체됐다. 국제 환경단체 그린피스(Greenpeace)의 영국사무소 활동가들이 삼성전자의 변화를 요구하며 벌인 캠페인이다.
런던만이 아니었다. 뉴욕의 삼성전자 매장 앞엔 태양광 패널로 무장한 그린피스 트럭이 등장했다. 독일 베를린궁에선 허리에 줄을 매단 활동가 다섯 명이 거대한 삼성의 옥외 광고판 위에 자체 현수막을 덮었다. 대만 삼성전자 매장 광고판에도 포스터가 걸렸다. 지난해 12월 삼성전자 글로벌 전략회의를 앞두고선 삼성전자 주요 임원 40여 명에게 우편으로 서한도 전달됐다. 이 공개서한은 뉴욕타임스 광고로도 실렸다. 시민 5만여 명도 삼성전자 임원진에게 직접 전자메일을 날렸다. 장소와 방식은 달라도 메시지는 하나였다. 석탄에너지에 의존하는 삼성전자, 이제는 ‘100% 재생 가능 에너지’를 약속하고 기후변화 대응에 나서라는 것.
묵묵부답이던 삼성전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지난 14일 삼성전자는 미국·유럽·중국에서 2020년까지 모든 사업장(제조공장, 빌딩, 오피스 포함)에서 100%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재생 가능 에너지 인프라가 부족한 수원·화성·평택 국내 사업장엔 태양광·지열 발전시설을 설치하고, 내년부터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에 가입해 상위 협력사 100곳의 재생 가능 에너지 확대도 이끌겠다는 계획도 담겼다.
삼성의 ‘에너지 전환 선언’ 뒤에는 그린피스의 2년이 넘는 ‘어드보커시(advocacy·옹호)’ 활동이 있었다. 1970년대 초 캐나다의 반핵 활동가 몇 명의 활동에서 시작된 그린피스는 기후변화 방지, 해양 생태계 및 산림 보호, 유전자 조작 및 독성물질 반대 등 전 지구적 환경 캠페인을 펼쳐왔다. 정부나 기업으로부턴 후원금을 일절 받지 않고, 오로지 전 세계 55개 국가에서 350만여 명 후원자의 회비로만 운영되는 곳. 그린피스는 정부나 기업의 실질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강력한 옹호 캠페인으로 유명하다.
특히 삼성전자의 경우 본사가 한국에 있어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의 역할이 컸다. 2015년 IT 기업의 지속 가능 에너지 전환 캠페인에서 시작해 2018년 삼성전자의 재생 가능 에너지 100% 선언까지…. 그사이 “쉼 없이 달려왔다”는 그린피스 서울사무소의 이인성(31)· 이진선(30) 두 캠페이너를 만나 옹호 캠페인으로 세상을 바꾸는 그린피스의 이야기를 물었다.
◇삼성전자, 100% 재생 가능 에너지 약속하다
―삼성전자 발표는 예상했던 수준이었나.
이인성(이하 인성)=”그린피스에서 구체적으로 삼성전자를 명시해 변화를 요구한 게 지난해 11월이다. 당시 삼성에선 ‘오는 8월에 재생 가능 에너지 전략을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내놨지만, 어느 정도 수준일지 미지수였다. 이맘때쯤 발간될 지속 가능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봐야겠다고 벼르던 중에 발표가 났다. ‘다른 덴 몰라도 삼성은 어려울 것’이란 회의적인 시선도 많았는데, 유의미한 선언이 나왔다. 삼성전자 캠페인은 그린피스 동아시아 사무소가 이끌었던 첫 글로벌 캠페인이라 전 세계에서 많은 축하도 받았다. 삼성전자 발표를 들은 직후엔 감정이 북받치더라. 끝이라기보단 다시 새로운 시작이다.”
―그린피스에선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진선(이하 진선)=”애플, 구글, 페이스북 같은 IT 기업을 포함해 세계적인 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이미 재생 가능 에너지 100% 전환을 이행해왔던 터라 빠른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의미도 크다. 삼성은 세계 최대 스마트폰 제조사고, 2016년 한 해에만 생산한 스마트폰이 전 세계 4억 대다. 한 해 전력 소비량이 도미니카공화국의 1년 전력 소비량에 맞먹는다. 국내 전력량의 65% 이상을 사용하고, 온실가스 배출량으론 10위권에 꼽힌다. 삼성전자의 협력사는 2000곳이 넘고, 애플이나 샤오미, 화웨이 같은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기도 한다. 이번 발표로 삼성은 동아시아에 기반한 전자제품 제조업체 중 재생 가능 에너지 목표를 공언한 최초 기업이 됐다. 삼성보다 적은 전력을 사용하는 기업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IT 및 제조업계에서 더 많은 기업이 에너지 전환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리라 본다.”
인성=“정부로서도 기회다. 정부는 지난해 ‘재생 에너지 3020 이행계획’을 발표했다. 1% 남짓 되는 재생 가능 에너지 비율을 2030년까지 20%대로 끌어올리겠다는 건데 산업계 참여가 관건이다. 이번 기회에 더 많은 기업이 참여하도록 정책적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재생에너지 관련 정책 때문에 기업이 재생 가능 에너지를 구매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만 해도 2020년이면 재생 가능 에너지 가격이 다른 화석연료와 비슷하거나 낮아진다. 대만도 2016년부터 재생 가능 에너지 구매가 가능해졌다. 정부에서 논의 중인 3차 에너지 기본계획에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이 담겨야 한다.”
◇페이스북, 애플, 구글 이어 삼성까지… 시민의 힘으로 기업을 흔들다
변화의 시작은 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9년 그린피스는 세계 최초로 글로벌 IT 업계의 에너지 사용 방식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그린피스 미국을 중심으로 애플·페이스북·구글 등 대형 데이터 운영업체들의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촉구하는 ‘쿨 IT 캠페인’을 시작한 것. 그해 처음으로 발간한 ‘쿨 IT 선두주자(Cool IT Leaderboard)’ 보고서에선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소프트뱅크, 시스코 등 IT 기업의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실태 등을 조사해 순위를 매겼다. ‘당신의 데이터는 얼마나 더러운가요?'(2012), ‘깨끗하게 클릭하세요'(2015) 등 IT 기업의 기후변화 대응 현주소를 짚는 보고서도 꾸준히 발간했다. 시민 참여 기반 캠페인도 이어졌다.
파장은 컸다. IT 기업에서 연이어 100% 지속 가능 에너지 전환을 선언한 것. “장기적으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편이 비즈니스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2011년 12월 페이스북을 시작으로 애플(2012), 구글(2013), 아마존(2014)에서도 ‘데이터센터 전력을 100% 지속 가능 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했다. ‘100% 전환’을 선언한 기업들이 전력회사에 ‘재생 가능 에너지’를 공급할 것을 요구하면서 여러 전력회사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태양열·풍력 에너지에 대한 정부의 세제 혜택이 더해지면서 지난 10년 사이 재생에너지 가격도 계속해서 내려갔다. 지난해 구글과 애플은 전사 차원(생산공장 포함)에서 100% 재생 가능 에너지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수백만 명 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환경단체가 10년 사이에 IT 업계 에너지 지형을 바꿨다.
―2009년 IT 업계를 대상으로 캠페인을 진행한 이유는 뭐였나.
진선=“글로벌 IT업계가 사용하는 전력량이 어마어마했다. 국가 전력량과 비교했을 때 2012년 기준 전 세계 3위 수준이었다. 증가 추세도 가팔랐는데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비중이 현저히 낮았다. 초기엔 페이스북, 애플 등의 충성도 높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페이스북이 석탄과 친구를 끊도록 도와달라’는 식이었다. 한국에선 2015년부터 ‘(화석연료 대신) 딴거하자’란 이름으로 같은 캠페인을 시작했다. 네이버, 다음카카오, KT, 삼성SDS, LG유플러스 등 데이터 센터를 보유했거나 고객사인 기업들의 탄소배출량 등을 비교하고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촉구했다.”
―기업들의 ‘100% 달성 선언’은 정말 믿을 만한가.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그린워싱(greenwashing)’은 아닌가.
인성=“그린피스에서는 기업들의 이행 여부를 끈질기게 추적한다. 2015년 ‘딴거하자’ 캠페인을 시작했을 때 네이버에서 한국 최초로 ‘데이터센터를 100% 지속 가능 에너지로 전환하겠다’고 약속했다. 2년 후 확인하니 데이터센터 전력 사용량이나 온실가스 배출 현황은 공개했지만 재생 가능 에너지는 여전히 2%대 수준이었다. 그해 그린피스가 발간한 보고서에서 네이버와 카카오 모두 C점을 받았다. 삼성SDS는 D점, KT나 LG CNS, LG유플러스, SK C&C 등 나머지 국내 IT 기업은 모두 F 낙제점이었다. 글로벌 IT 기업들도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본다. 100% 달성을 선언한 애플이나 구글은 다른 기업을 견인한다는 측면에서 선도적이지만 앞으로 재생 가능 에너지 조달 방식 등에서 더 발전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변화를 상상하고, 대안 제시해 길 내는 일
그린피스 DNA의 핵심은 ‘변화를 만드는 것’. 옹호 캠페인은 그린피스 활동의 핵심이다. 그린피스는 초창기 반핵운동, 포경산업(고래잡이) 반대 운동을 시작으로 지난 40여 년간 환경 분야에서 상당한 변화를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것이 원단 및 유통업체 등 의류 생산망 전반을 대대적으로 바꿔 온 ‘디톡스 마이 패션(Detox My Fashion)’ 캠페인. 2011년 의류 생산 과정 및 공급망에서 총 11개의 유해 화학 물질을 퇴출할 것을 촉구한 캠페인은 지금까지 H&M, 버버리, 자라 등 80여 개의 의류·유통 기업으로부터 유해 화학 물질의 사용과 유통 중단을 약속하는 ‘디톡스 선언’을 이끌어 냈다. 2015년 말부터는 아웃도어 의류업계를 대상으로 특정 화합물 사용 금지를 촉구했으며, 그 결과 2017년 고어텍스 개발사인 고어(Gore)로부터 2023년까지 모든 아웃도어 제품에서 유해성 PFC 사용을 중단하겠단 약속도 받아냈다.
이뿐 아니다. 3년의 캠페인 끝에 2015년엔 석유기업 셸의 북극 석유시추를 막아내는가 하면 남극과 북극, 인도네시아 숲 등 해양 및 산림 생태계도 정기적으로 감시한다. 기후변화는 그린피스에서 가장 중대하게 여기는 현안이다. 지난해엔 세계 최대 석탄화력발전소가 있는 충남 당진에선 1000여 명이 모여 대규모 행진을 벌였고, 그해 12월 당진에 건설 예정이었던 신규 석탄발전소 건설이 취소됐다. 그린피스의 캠페인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변화를 만드는 그린피스 캠페인의 ‘노하우’를 꼽자면.
진선=“첫째는 과학적인 분석과 조사다. 근거가 되는 자료를 분석하고 축적해 데이터를 바탕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제시한다. 둘째로 ‘피플파워(people power)’다. 시민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비폭력 직접행동’도 그린피스 캠페인의 핵심이다. 건물 외벽에 프로젝트로 빔을 쏘거나, 옥외광고판 포스터를 바꿔 다는 등 폭력적이지 않지만 창의적인 방식으로 직접 행동하는 방식이다. 후원자 중 ‘비폭력 직접행동’ 트레이닝을 받은 분들이 ‘캠페인 활동가’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조직되어 있다. 기업과 정부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모금이 어려워서’ ‘특정한 정치적 색채로 비칠까봐’ 옹호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단체도 많은데….
인성=“캠페인을 ‘화재 현장’에 비유한다. 불을 보고 혼자 위험하다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방향을 제시하고 사람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게 캠페인의 핵심이다. 전략을 잘 세우면, 사람들의 행동을 바꿔서 힘을 모아 함께 불을 끌 수 있다. 그린피스에선 모든 캠페인을 기획할 때 만들어내려는 변화의 목표를 먼저 잡는다.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전략 가설을 수십 번 수정한다. 문제제기에 그치는 경우는 없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가설에서 시작해 변화를 현실로 바꾸는 게 캠페인이다. 이게 곧 그린피스가 40여 년간 변화를 만들어 온 힘이지 않을까(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