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4일(화)

[고대권의 지금 이곳의 문장-①] “왜 호빗이 절대반지를 운반할까?”

왜 호빗이 절대반지를 운반할까? 

 

영화 ‘반지의 제왕’은 크게 두 개의 서사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중간계를 지배하려는 악의 세력 사우론-사루만의 군대에 맞서 중간계를 지키려는 엘프-인간 연합군의 전쟁이다. 이들 연합군은 반목과 분열을 거듭하는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간다. 또 하나의 서사는 절대반지를 영구히 파괴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프로도와 샘의 여정이다. 두 호빗은 작은 반지를 운반할 뿐이지만, 이 반지야말로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열쇠다.

3부작에 걸친 긴 영화에서, 프로도와 샘은 곤경에 빠지고 간신히 탈출하기를 반복한다. 그들은 인간보다 작고 약하며, 엘프와 같은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마법사와 같은 지혜도 없고, 드워프 같은 용맹함도 없다. 호빗이란 종족은 중간계의 운명을 짊어질 정도의 ‘영웅’이라고 보긴 힘들다.

그러나 영화는, 두 호빗에게 중간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여정을 맡긴다. 왜 호빗일까?

출처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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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시리즈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반지의 강력한 유혹에 빠져 자신을 상실하는 다양한 유형의 위대한 존재들을 보여준다. 반지의 유혹은 선과 악의 구분이 없이, 적과 아의 구분이 없이 모두를 장악한다. 반지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을 자극하고, 반지를 통해 그 욕망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제공한다. 위대한 존재들도 이러한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반지로 자극된 욕망에 의해, 반지는 나의 보물이라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그러나 그 욕망은 자기 내면의 욕망이 아닌 반지의 욕망이다. 내면의 욕망을 대체해버리는 절대적인 욕망, 그것이 절대반지의 실체다. 그래서 절대반지에게 욕망을 들킨 자는 이 반지를 파괴할 수 없다.

출처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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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 역시 반지의 유혹에 시달린다. 호빗이라고 해서 이런 유혹을 이겨내는 마법 같은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빗은 위대한 전사들이 갖고 있지 못한 다른 힘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위험하고 힘든 순간에 떠오르는, 고향 샤이어에서의 삶. 정원을 가꾸고, 제철에 맞춰 잘 익은 과일로 술을 담그며, 사랑하는 파트너와의 미래를 그려보고 이들을 지켜주겠다는 마음만으로 행복감이 가득한 소소한 삶.

이것들이 호빗의 진짜 욕망이다. 이 욕망의 특징은, 이를 이루는데 반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신 하루하루 잘 짜인 일상과 이웃이 필요할 뿐이다. 이를테면, 평범성(banality)이 필요하다. 프로도는 이런 평범성과 함께 모험심을 갖춘 인물이다. 프로도는 이 모험심으로 스스로를 반지의 운반자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런 프로도 곁에 있는 샘은 한결같은 조언자로서 프로도에게 용기를 준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 프로도와 충직한 샘, 나는 이를 ‘선의 평범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들의 여정을 시민(프로도)과 건강한 비영리조직(샘)의 파트너십으로 설명하고 싶다. 사실 이 이야기는 현재의 한국사회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성장에 제도권이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대신 제도권을 압박하고, 때로는 물러나게 만들었던 시민의 존재가 한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 모든 시민은 날 때부터 천부적 권리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날 때부터 시민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교육을 필요로 하고, 적절한 경험을 필요로 한다. 교육과 경험의 반복이 성찰을 유도하고, 이 성찰의 끝엔 국가의 주인으로서의 시민에 대한 자각-시민성이 있다. 시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리와, 시민으로서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책임이 그것이다. 건강한 비영리조직은 시민의 권리가 제한될 때 이의를 제기하고, 시민의 책임이 방기될 때 조언에 나선다. 시민과 비영리조직의 파트너십은 제도권의 한계에서 시작해 그 바깥으로 민주주의의 영역을 확장한다. 한편 비영리조직은 시민의 시민성을 대체할 수 없다. 이를 테면, 샘이 프로도를 대신해서 반지를 운반할 수는 없다. 기진맥진한 프로도를 샘이 잠시 업어줄 수는 있겠지만, 프로도의 임무는 프로도만이 수행할 수 있다. 비영리조직이 시민을 ‘대체’하고 시민이 수동적인 객체로 머무는 순간, 민주주의는 쇠락한다. 이런 측면에서 시민과 비영리조직은 그 관계 자체가 의미이다. 기부와 봉사는 이 관계의 극히 일부분일 것이다. 최근 한국이라는 중간계는 시민과 비영리조직의 파트너십을 통해 놀라운 순간에 도달하고 있다.

사실, “왜 호빗인가?”라는 질문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가 완결된 후 제작된, 시리즈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호빗 시리즈에서 다루어진다.

‘호빗 : 뜻밖의 여정’에서 위대한 엘프 갈라드리엘은 호빗 빌보 배긴스의 여정을 지켜보는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에게 묻는다.

“왜 호빗인가요?”

간달프는 답한다.

“글쎄요…. 사루만은 오직 위대한 힘만이 악을 가둘 수 있다고 믿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평범한 사람들의 소소한 생각들이 악을 잠재우지요. 선행과 사랑과 같은….”
출처 네이버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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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최근 우리 사회 최고의 정치권력과 최대의 경제권력, 이른바 두 개의 탑이 위기를 맞이했다. 그들을 위기로 몰아넣은 것은 거대한 자본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정당도 아닌, 바람을 불면 훅 꺼질 촛불을 운반하는 사람들이다. 어찌 보자면 호빗 같은 사람들이다. 시장과 정치의 주체로서 개인이 가진 힘과 그 힘이 수반하는 책임을 온전히 자각한 이들이 시작한 행진은 도도한 물결을 이루었다. 이것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이다.

이 패러다임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 안타까운 사태가 생긴다. 벚꽃 대선 체제로 정비를 서두르고 있는 정치권의 구태가 그 예다. 이들은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스스로 대안임을 천명하고 있다. 새로운 탑이 생기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질 것인가. 그건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광장은 한 편으로 제작된 드라마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리즈는 이제 시작했고, 새로운 리더십은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게 시민사회와 함께 한국사회의 미래를 고민해야 한다.

기업은 이 패러다임의 대두를 근본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최근 몇몇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위기 중 대부분이 시민에 의해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직원이 자녀를 양육할 수 없는 근무 환경, 협력업체에게 요구하는 과도한 희생, 영업이익에 대한 욕심으로 허용하는 부정과 부패, 일하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인식하는 노동관행, 이해관계자와 환경과 사회에 대한 무책임. 이런 것들이 기업의 지속가능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음을 인지해야 한다. 생색내기 차원의 사회공헌이나 지속가능경영으론 세상의 변화를 감당할 수 없다. 사내외에 분포하고 있는 사회적책임(CSR)의 이슈들을 수합하고 정리해야 한다. 지금까지 발간했던 홍보용 지속가능경영보고서가 담고 있지 못했던 진짜 이슈들을 선별하고, 각각의 중대성을 다시 평가해, 구체적인 해결과제들을 정립해야 한다.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사회가치 관련부서들은 기업 내외부의 현장과 비영리조직,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정확하게 수합해 분석하고 대응해야 한다.

정치이건, 기업이건 그냥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그 누가 보더라도 바르고 정당한 길, 지금은 그 길이 지름길이다.

고대권의 지금 이곳의 문장
[지금 이곳의 문장]은 우리 주위의 문화 콘텐츠에 등장하는 한 줄의 문장에서 공익적이며 사회적인 영감을 찾아보는 칼럼이다.

작가 고대권은 사회적책임(SR)의 연구자이며 저널리스트이다. 영화비평으로 신춘문예에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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