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4% ‘장기·안정적 투자’ 꼽아…기업 전문성 활용 57.1%
혁신·실험, 정부·기업·비영리 잇는 가교 역할도 강조
정부는 예산과 제도의 틀 안에서 움직이고, 기업의 CSR 조직은 경영 성과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현장 전문성을 갖춘 비영리단체는 안정적인 재원 확보가 늘 과제다. 그렇다면 이들 사이에 자리 잡은 기업공익재단의 역할은 무엇이어야 할까.
국내 21개 주요 기업공익재단의 답변을 분석한 결과, 기업공익재단의 차별화된 역할은 크게 네 가지로 모였다. 15곳(71.4%)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선택했고, ‘기업의 기술·전문성·인프라를 공익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 12곳(57.1%)으로 뒤를 이었다. 이 밖에 ‘실패 가능성이 있는 혁신적 사업에 먼저 도전하는 것’은 4곳(19.0%), ‘다양한 민간 파트너와 섹터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은 3곳(14.3%)이 꼽았다.

‘앞으로 기업공익재단이 정부나 기업 CSR 조직, 일반 비영리단체와 구별되는 역할을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라는 서술형 문항에서도 비슷한 방향의 답변이 이어졌다.
◇ 분기·연간 성과 아닌 ‘10년’을 보는 자본
가장 두드러진 키워드는 ‘장기성’이었다. 정부 사업은 회계연도나 정책 변화의 영향을 받고, 기업 CSR은 단기 경영성과나 홍보 효과를 고려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한 사회문제를 장기간 붙잡고 투자할 수 있다는 점이 기업공익재단의 차별성이라는 것이다.
DB김준기문화재단은 “정부는 예산 집행의 경직성 탓에 도전을 꺼리고, 기업 CSR은 분기 실적에 쫓기며, 일반 NPO는 모금 압박에 시달린다”며 “기업공익재단은 당장 수치적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미래 인재의 잠재력에 10년, 20년 장기 투자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재단은 실제로 장기 지원형 인재 육성사업인 ‘드림빅’을 운영하고 있다. 보호대상 청소년을 중학교 3학년 때 선발해 자립할 때까지 장학금과 교육, 멘토링을 지원한다. 매년 40명을 새로 선발하며, 단년도 장학금 지급보다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을 장기간 함께하는 데 초점을 둔다.
현대차정몽구재단의 ‘현대차 정몽구 스칼러십’도 한 명의 장학생을 수년에 걸쳐 지원한다. 대학생은 정규 학기 내 졸업 시점까지 지원하고, 대학원생은 석사 최대 4학기, 박사 최대 8학기, 석박사통합과정은 최대 10학기까지 학습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 아세안 장학생에게도 입학부터 졸업까지 등록금과 학습장학금을 지원한다.
◇ 모기업의 인프라와 기술을 공익 현장으로
두 번째로 많은 응답은 기업이 가진 고유 역량을 사회문제 해결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LG연암문화재단은 “기업공익재단은 기업의 업과 연관된 전문성과 자원을 사회적 문제와 연결시키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비전과 지속적인 의지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재단은 LG AI연구원, LG전자 등 그룹 내 AI 연구 역량을 결집해 매년 3만3000명 이상의 청소년에게 무상 AI 교육을 제공하는 ‘LG디스커버리랩’을 운영하고 있다.

금융사의 인프라를 교육 공간으로 활용한 사례도 있다. KB금융공익재단은 KB국민은행 신관의 ‘KB STAR*D홀’을 청소년 경제금융교육과 디지털 금융기술 체험에 활용하고 있다. 학교와 공공기관 등의 신청을 받아 청소년들이 금융에 접목된 디지털 기술을 직접 경험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 아직 해법 없는 문제에 먼저 돈 대는 ‘사회문제 R&D’
‘실패 가능성이 있는 혁신적 사업에 먼저 도전하는 것’도 기업공익재단의 고유 강점으로 꼽혔다. 정부나 기업 조직이 성공 가능성이 불확실한 사업에 투자하기 어려운 만큼, 기업공익재단이 먼저 위험을 감수하며 새로운 해결 방식을 시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SK행복나눔재단은 기부 방식 자체를 실험했다. 2020년 시작한 ‘곧장기부’는 지역아동센터 등 기부처가 필요한 물품을 직접 장바구니에 담으면 시민이 해당 물품 구입비를 기부하는 방식이다. 기부금은 100% 기부처에 전달하고 결제 영수증과 배송 과정도 공개한다. 결제수수료와 배송비 등 운영비는 재단이 별도로 부담한다. 기존 기부에서 제기돼 온 ‘내 돈이 실제 어디에 쓰였는지 알기 어렵다’는 문제를 기부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방식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후에는 물품 지원을 넘어 점자 동화책 제작, 장애인 맞춤운동 등 사회문제 해결 프로젝트에 직접 기부하는 ‘임팩트 기부’로 모델을 확장했다. 2026년 1월 누적 기부금은 50억 원을 넘어섰다.

SK행복나눔재단은 “기업의 예산은 이익을 위해 쓰여야겠지만, 재단으로 넘어온 뒤로는 문제 해결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예산이 되어 자본에 대한 차별성을 지니게 된다”며 “비영리가 들어가지 못하는 영역을 찾고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도 가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삼성복지재단은 최근 영유아 발달지원 분야에서 새로운 모델을 내놨다. 육아정책연구소와 약 2년에 걸쳐 개발한 영유아 발달지원 통합 플랫폼 ‘새싹과단비’를 지난 8월 공개했다. 생후 12개월부터 만 5세까지 영유아의 발달 상태를 부모와 교사가 일상 관찰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결과에 따라 발달지원 놀이와 거주지역 전문기관 정보를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단순히 발달검사를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발달 확인-가정·기관에서의 놀이 지원-전문기관 연결’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이어지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교보교육재단, 예강희망키움재단 등은 기업공익재단이 기업과 공익 현장을 잇는 ‘중간 플랫폼’이자 ‘가교’가 되어야 한다고 봤다.
교보교육재단은 “기업공익재단은 비영리 생태계에 있으면서 기업의 언어와 행정의 언어를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조직”이라며 “기업의 역량을 공익 프로젝트에 활용하고, 민간에서 효과가 확인된 모델을 정부 정책이나 제도로 확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유현·채예빈 더나은미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