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일)

“기업 사회공헌 아닙니다, 진짜로 제가 좋아서 할 뿐”

기업과 분리되는 재단, 직함 내려놓는 오너

과거와 달리 오너 사회공헌의
기업과 재단 경계 분명해져

정기적인 스터디 모임부터
개인 비용으로 몰래 기부까지

최근 몇 년 사이 기업 오너가 사재를 출연해 세운 재단이 줄을 잇고 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이 세운 ‘서경배과학재단’, 김준일 락앤락 회장의 ‘아시아발전재단’, 조창걸 한샘 명예회장의 ‘여시재’, 이기형 인터파크 회장의 ‘카오스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기존 기업 재단이 비슷비슷한 형태의 사회공헌 목적으로 설립됐다면, 최근 세워진 재단들은 ‘민간 싱크탱크(Think Tank)’, ‘기초과학 연구’, ‘아시아 인재 육성’ 등 설립 목적과 방향이 명확한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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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형 인터파크홀딩스 회장 / 카오스재단

◇공부 모임부터 몰래 기부까지…재단 설립 원천은 ‘개인적 관심’

지난달 정식 출범한 ‘한국형 싱크탱크’ 여시재는 ‘신문명(新文明)’에 대한 조창걸(77) 한샘 명예회장의 개인적 사색 위에 세워졌다. 조 명예회장은 30세에 서울대 건축과 동문인 고(故) 김석철 교수와 함께 ‘응용과학연구소’를 세웠을 만큼 학구적인 인물로 정평이 나있다. 한샘 설립 이후에도 학자들과 개인적인 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여시재의 이사장을 맡은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와의 인연 역시 여러 공부 모임 중 하나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원재 여시재 기획이사는 “동서양의 지혜를 결합한 미래 전략으로 지속 가능한 발전과 사회 혁신을 도모하는 것이 여시재의 과제”라고 말했다.

이기형(53) 인터파크홀딩스 회장이 ‘과학의 대중화’를 목표로 2014년 설립한 ‘카오스(KAOS)재단’ 역시 천문학을 전공한 이 회장의 지적 욕구에서 출발했다. 동문인 김민형 옥스퍼드대 수학과 교수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82학번 동창들과 ‘과학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던 중 콘서트를 기획하고 재단까지 만들게 된 것. 김남식 카오스재단 사무국장은 “이 회장이 기업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김성근 서울대 화학부 교수(카오스재단 과학위원장)와 정기적으로 과학 스터디 모임을 가질 만큼 배움에 열의가 깊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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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 락앤락 회장 / 조선일보DB

이달 1일 출범한 ‘서경배과학재단’은 한 해 3~5명의 과학자를 선발해 최대 5년간 25억원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서경배(53) 회장이 기초과학 지원에 이름까지 걸기로 마음먹은 데는 1991년, 회사가 총파업으로 망할 위기에 놓였을 당시 중앙연구소 설립으로 재기했던 경험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서 회장은 “내게 과학은 곧 희망”이라면서 “신진과학자 연구 지원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인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준일(64) 락앤락 회장이 올해 3월 설립한 아시아발전재단은 고려인·조선족 등 한민족 청년 리더 교류에 힘을 쏟고 있다. 미얀마·베트남·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그램과 서울대·연변대의 학술 교류 지원도 준비 중이다. 조남철 아시아발전재단 상임이사는 “김 회장이 개인적으로 연변대학에 장학기금을 만드는 등 재단 설립 전부터 관련 분야에 조용히 기부해온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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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 /서경배과학재단

◇”기업 사회공헌 아냐”…재단 인사 분리하고 직함 내려놓는 오너들

이 재단들의 공통점은 시작부터 ‘기업’과 ‘재단’의 경계(境界)를 분명히 한다는 점이다. 과거 기업 오너의 사회공헌은 기업의 사회공헌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뚜렷했다. 개인과 조직을 분리하지 않고, 세습적 구조를 유지하는 국내 재벌 문화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 하지만 최근 재단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혹은 ‘개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많다.

서경배 회장은 재단 설립 기자간담회에서 “아모레퍼시픽은 이미 연구 사업에 연간 수천억원을 쓰고 있다”면서 “재단의 성과가 그룹을 위해 쓰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설립 배경에 대해서도 “내가 그동안 받았던 관심과 사랑을 갚고자 (기업 사회공헌이 아닌) 개인적인 방법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조직 간 인사 분리를 확실히 하는 모습도 두드러진다. 카오스재단과 아시아발전재단의 경우, 모든 상근 직원이 재단을 위해 신규 채용한 사람들로 채워졌다. 전혀 관련 없는 업무를 담당하던 기업 직원을 재단으로 전보하는 등, 인사부터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했던 일부 기업 재단들과 차별화된 부분이다. 각자 전문화된 사업 영역을 가진 만큼 이사진 구성도 특별하다. 카오스재단은 국민의당 오세정 의원을 필두로 허원기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김성근 서울대 화학부 교수 등 과학자들을 이사에 포함시켰다. 지동섭 SK텔레콤 부사장(물리학과), 오규석 대림산업 사장(경제학)도 이사진에 이름을 올렸다. 서경배과학재단 역시 김병기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오병하 카이스트 생명과학과 교수 등 과학자들을 이사로 초빙했다. 이우영 전 태평양제약 대표가 상임이사를 맡았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여시재의 이사회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 김도연 포항공대 총장, 안대희 전 대법관, 김현종 전 UN대사 등 각계 인사가 고루 포진했다. 조창걸 회장은 아예 여시재가 정식 출범하기 전인 지난 4월, 이사직을 사퇴했다. 순수 개인 자산으로 설립된 재단 중에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특별한 행보다. 황동일 여시재 본부장은 “한샘의 사업적 고려나 조창걸 회장 개인의 소명과 상관없이, 여시재가 완전히 독립된 전문 싱크탱크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의지 표명”이라고 전했다.

김준일 락앤락 회장 역시 아시아발전재단을 설립하면서 “직함 없이 출연자로 남고 싶다”는 뜻을 비쳤으나, 재단의 빠른 안정을 바라는 주변의 권고로 이사장직을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오종남 새만금위원회 민간위원장,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 장관, 조평규 중국 옌다그룹 집행동사장(대표), 차동민 전 서울고검 검사장 등이 아시아발전재단의 이사로 활동 중이다.

한편 대부분의 재단이 초기 단계라 기부금 집행 내역은 아직 확정되진 않았다. 이기형 회장은 지금까지 18억원가량을 카오스재단에 현금 기부했고, 매년 사업비를 기부하는 형태를 취한다. 서경배 회장은 “연구 지원 사업이시작되면 1년에 150억 정도가 필요한데, 이 부분은 우선주를 현금화해 기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창걸 회장 측은 “이미 출연한 부분에 대해 액수를 얘기하는 건 적절치 않고, 확실한 성과를 낼 수 있을 때까지 필요충분하게 지원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올해 20억원을 출연한 김준일 회장은 내년 50억원에서 향후 500억원까지 기부 규모를 늘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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