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7일(목)

학대 아동 신고 안 하면 과태료… 그 후엔 수수방관

아동학대 특례법 시행 6개월
신고 의무자 의심만 돼도 신고해야… 112로 신고번호 통합, 24시간 가능
교육 안 하면 300만원 이하 과태료… 피해 아동 사후보호·지원 시급

지난 21일 오후, 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그리스도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의실에선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 교육이 한창이었다. 가정어린이집 원장 100여명의 시선이 영상에 집중됐다. CCTV 화면 속 아동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온몸을 떨고 있었다. “머리를 쓰다듬을 때 아동이 반사적으로 방어하는 자세를 보이면 학대 피해를 의심해야 합니다.” 노장우 서울 강서아동보호전문기관장의 설명에 원장들의 손이 바빠졌다. “여기 모인 원장님들 모두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라는 것, 알고 계시죠? 학대가 의심만 되어도 신고해야 하고, 신고하지 않으면 500만원 이하 과태료를 물게 됩니다.”

지난해 9월 시행된 ‘아동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아동학대 특례법)’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자, 곳곳에서 원장들이 각자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대로 씻기지 않아 아이 몸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서, 방임을 의심하고 어머니께 몇 차례 말씀드렸는데 달라지지 않는다” “아이를 애지중지 키우는 부모로 알고 있는데, 요즘 집에서 멍들어 오는 경우가 있어 신고해야 할지 고민된다” 등 사례도 다양했다.

지난해 9월 시행된 아동 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으로 신고 의무와 아동 학대 교육이 강화됐지만, 한 해에 1만 명 가까이 발견되는 학대 피해 아동의 후속 지원이 시급하단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선일보 DB, 굿네이버스 제공
지난해 9월 시행된 아동 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으로 신고 의무와 아동 학대 교육이 강화됐지만, 한 해에 1만 명 가까이 발견되는 학대 피해 아동의 후속 지원이 시급하단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조선일보 DB, 굿네이버스 제공

◇아동학대 신고 112로 통합… 아동 본인 신고 늘고, 신고 의무자는 망설인다

지난해 12월 31일, 부모의 상습적 학대 사실을 신고하지 않은 강원 지역 중학교 교사 3명에게 과태료가 부과됐다. 아동학대 특례법이 시행된 이후 신고 의무자에게 과태료가 부과된 첫 사례다. 아동학대 특례법에 따르면, 교직원·의료인·상담교사 등 24개 직군을 신고 의무자로 규정하고, 학대 의심 사례를 신고하지 않는 사람에게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하도록 했다. 아동학대 신고 전화도 112로 통합해 24시간 신고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특례법 시행 후 지난 6개월간, 약 160만명으로 추산되는 신고 의무자의 아동학대 신고 건수는 전체의 25.3%(1855건)에 불과하다. 반면, 아동 본인·부모·친인척·친구·종교인 등 신고 비의무자의 신고가 74.6%(5484건)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신고 의무자의 신고율이 절반을 넘는 호주(73%), 일본(68%), 미국(58%)보다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장화정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관장은 “112로 번호가 통합돼 편리해졌지만 오히려 자신의 신고로 학부모·이웃을 범죄자로 만든다는 망설임과 죄책감이 있는 것 같은데, 신고자에 대한 비밀은 엄격하게 지켜진다”면서 “반면 아동 본인이 학대 신고를 하는 경우가 2년 전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고, 친구의 학대 사례를 신고하는 아동 숫자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어렵게 쌓은 아동·부모와 맺은 신뢰 관계가 신고로 깨질까 염려하는 신고 의무자가 많았다. 3년간 가정어린이집을 운영해온 A원장은 “엄마가 베트남인인 네 살짜리 남자아이가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멍이 들어 있어서 신고를 고민하다가 일단 어머니께 조심스레 여쭤봤다”면서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아빠가 때렸다’고 하시기에 신체 학대의 위험성을 말씀드리고 교사들과 아이를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귀띔했다. 당장 도움이 시급한 가정일 경우 신고가 미뤄지는 경우도 있다. 10년간 지역아동센터를 운영해온 C센터장은 “센터에 나오지 않는 아이가 있어서 가정 방문을 했는데, 쓰레기장 같은 집 안 곳곳에서 구더기가 나오고 아이는 영양실조 상태이더라”면서 “일용근로자인 아버지가 다리를 다친 뒤 아이를 방임하는 상황이라 당장 신고보단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후원자를 연결하고 이혼한 어머니와 할머니께 연락드려 아이를 보살피도록 했다”고 전했다.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_그래픽_아동학대_아동학대상담및실제사례건수_2015

◇의무교육 강화에 민간 업체 득실… 전문 인력 시급해

“민간 업체로부터 하루에 10통 넘게 전화가 옵니다. 아동학대 교육해주겠다며 찾아와 대충 만든 PPT로 강의한 뒤, 보험 상품이나 식품 등을 실컷 홍보하다 갑니다. 좀 더 전문적인 교육에 대한 교사들의 욕구가 큰 만큼 아쉬움도 큽니다.”

신경은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이사의 말이다. 오는 9월 28일 시행되는 아동복지법에 따르면,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가 속한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등 각 기관의 장은 신고 의무 교육을 실시하고 그 결과를 제출해야 한다. 신고 의무 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면 3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정작 이를 교육할 전문 기관과 인력은 부족하다. 전국의 아동보호 전문 기관은 총 53곳. 한 기관당 아동을 평균 19만명 담당하다보니 사례관리·행정업무만으로도 버겁다. 홍창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 홍보협력팀장은 “지난해 이러한 상황을 예상해 온라인 신고 의무자 교육 예산 10억원을 책정했는데 기재부 승인을 받지 못한 데다가, 지자체별로 의무교육 기준·관리가 다르고 체계화되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라고 설명했다. 복지부 아동권리과 관계자는 “얼마 전 아동학대 예방 상담사 자격증을 만들겠다는 협회의 요청이 있어서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민간 업체들의 아동학대 신고 의무자 교육은 명백히 불법”이라면서 “중앙아동보호전문기관에 아동학대 교육 자료를 공개한 뒤, 2015년 복지부 지침에 해당 자료를 활용해 기관 내 자체 교육으로 의무교육을 대체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고 전했다.

◇신고 이후 피해 아동 보호 심각… 주변의 협력과 부모 교육 시급해

한편 피해 아동의 사후 보호와 지원은 열악한 상황이다. 지난 3개월간 서울의 한 정신건강증진센터는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해달라는 출동 요청을 6차례 받았다. 막상 가보니 여섯 번 모두 같은 아동이었다. 알코올중독인 아버지가 아동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할 때마다 이웃이 학대 신고를 했지만, 경찰 출동 당시 폭행이 끝났거나 아버지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이유로 매번 귀가조치됐던 것. 학대 피해 아동을 보호할 쉼터나 그룹홈 숫자도 미미하다. 현재 학대 피해 아동을 위한 그룹홈은 36개. 올해 22개 증설될 계획이지만, 매년 생기는 피학대 아동 약 7000명을 보호하기엔 역부족이다.

주변의 관심과 아동학대에 대한 홍보도 중요하다. 김은숙 성내초등학교 교감은 “지난해부터 ‘주변을 다시 살펴보자’는 뜻으로 ‘보라캠페인’을 실시하면서 학부모·교사·학생을 대상으로 아동학대 연수와 교육을 진행하고 있는데, 실제로 교육을 받은 학부모들한테서 이웃 아동학대 신고가 학교로 들어오고 있다”면서 학부모의 인식 개선 사례를 전했다. 노장우 서울강서아동보호전문기관장은 “아동학대 가해자의 83%가 부모인 만큼, 신고 의무만큼이나 부모를 대상으로 한 양육, 아동 인권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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