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는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았다. 동유럽 곡창지대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식량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 서민들은 치솟는 물가로 고통받았다. 중국에서는 사상 최악의 가뭄으로 양쯔강이 말랐고, 파키스탄에서는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 올해는 슈퍼엘니뇨가 시작되면서 세계는 또다시 폭염과 가뭄, 연이은 산불로 시름이 깊어 간다. 서민들은 벌써 내년 식품 물가를 걱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다 나빴던 건 아니다. 식량 생산이 원활하지 못하면 더 호황인 업종도 있다. ABCD라는 별칭 또는 곡물 메이저로 불리는 ADM, 벙기(Bunge), 카길(Cargill), LDC가 그 주인공이다. ABCD 중 맏형 격인 카길은 지난해 매출액 1770억 달러로 최고를 갱신했다. 전년보다 120억 달러가 더 증가한 수치였다. 나머지 세 기업의 매출액도 전년 대비 평균 110억 달러 더 늘었다. 기후가 불규칙해져 농산물 생산에 차질이 커질수록 곡물 거래기업의 수익은 증가한다.
기상학자들은 내년을 더 걱정한다. 올해 폭염을 몰고 온 슈퍼엘니뇨가 내년에는 더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내년 이후의 식량 사정 역시 호전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그 이후는 더 나아질까? 그럴지도 모른다. 한두 해 좋아질 수도 있겠지만 커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80% 이상의 곡물을 해외시장에서 구매하고 있다. 국제 곡물 시장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외교·안보 분야 최정상급 싱크탱크인 채텀하우스는 “일본과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위험에 노출된 국가 중 하나”라며 식량공급망의 취약성을 경고한다. 이것은 단순히 공급망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해 우리나라 농식품 수입액은 484억 달러, 수출은 88억 달러였다. 농식품 무역적자는 396억 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무역적자의 85%를 차지했다. 농식품 산업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경제와 식량 모두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기후위기가 가속화될수록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정부에서도 글로벌 규모의 식량 위기가 닥친 2008년 이후 식량 공급망을 다각화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했다. 세계 곡물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곡물거래 기업 설립과 곡물엘리베이터 확보를 시도했다. 자본력과 경험이 충분한 곡물 메이저의 방식을 따랐지만 결론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지금은 일부 대기업이 세계 곡물 시장에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에 올람 인터네셔널이라는 기업의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올람(Olam)은 인도계 섬유 기업인이 1989년 나이지리아에서 농산물 거래를 목적으로 창업한 기업이다. 곡물 메이저 기업이 다루기에는 규모가 작은 캐슈넛, 코코아, 면화, 고추 등 틈새시장, 그리고 그간 교류가 별로 없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직접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1996년 올람의 가능성을 알아본 싱가포르 무역개발청은 올람의 본사를 런던에서 싱가포르로 옮기게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후 싱가포르 국영 테마섹 홀딩스가 올람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기업을 공개하고, 2015년에는 미쓰비시상사에 일부 지분과 운영권을 넘기면서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한다. 지난해 올람의 매출액은 540억 달러로 곡물 메이저에 필적할 만한 크기로 성장했다. 지난해 국내 농업 총생산액 58조6000억원을 넘어서는 규모다.
채텀하우스의 경고대로 우리나라 식량 공급망은 취약하기 그지없다. 곡물자급률은 20%가 채 안 되고, 식량 대부분은 파나마운하, 말라카해협, 대만해협을 거쳐 국내로 들어온다. 서민들은 국제분쟁과 기상재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 졸이며 국제뉴스를 쳐다본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나라 미래 성장을 견인할 세계 식량산업에서 완전히 소외된 상황이다. 네덜란드의 농업 총생산액은 36조원에 불과하지만, 농산품 수출액은 174조원에 이른다. 우리가 네덜란드에서 배워야 할 것은 스마트팜만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위기는 기회와 함께 온다. 이번에는 우리가 잘하는 방식으로 도전해 보자.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의 농업기술과 해외농업 협력망을 갖추고 있다. 지난 세월 농업국제협력 사업을 통해 구축된 자산이다. 식품과 그린 바이오산업 역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도대체 잘못 할 이유를 찾기가 오히려 어렵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식량산업 대한 비전과 혁신을 이끌어갈 리더십이다.
남재작 한국정밀농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