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원 여성이사 3인 인터뷰]
상장사 여성이사 비율
중국·일본보다 낮아
풀무원 여성이사들
젠더 관점 질문으로
여성임원 비율 높여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이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난해 8월 시행된 ‘여성이사 할당제’의 영향이다. 여성이사 할당제는 자산 2조가 넘는 상장 기업이 이사회를 특정 성별(性別)로만 구성할 수 없게 하는 제도다. 기존의 이사회가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여성이사를 1명 이상 두도록 법으로 정한 것이다.
법 시행 이후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사회 규모와 상관없이 여성 사외이사를 1명만 선임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법적 요건만 겨우 충족시킨 ‘구색 맞추기’라는 비난도 나온다. 여성 사외이사를 3명이나 보유한 풀무원이 특이한 케이스로 꼽히는 이유다.
이사회에 들어간 여성이사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여성이사 할당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지난 8일 이경미(서울대 경영학과 교수)·심수옥(성균관대학교 경영전문대학원 교수)·이지윤(플레시먼힐러드 상임고문) 등 풀무원 여성이사 3인에게 물었다.
―여성이사 할당제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다소 아쉽다는 평가도 있다.
심수옥=미국이나 유럽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다. 작년 6월에 EU 의회가 대단한 결정을 하나 했다. 27개 전 회원국을 대상으로 여성이사 40% 할당제를 시행하기로 한 것이다. 전년도에 법안을 상정하면서 9개국을 대상으로 테스트를 했는데 굉장히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특히 양성평등 면에서 발전이 있었다. 여성 경영진 비율이 높아졌고, 시행하지 않은 기업들보다 재무적 성과도 높게 나타났다. 이 결과를 기반으로 확대 시행을 하게 된 것이다. 2021년 기준 국내 상장사의 여성이사 비율이 8.7%로 나타났는데, 가장 낮은 축에 속하는 중국(13.8%)이나 일본(12.6%)보다도 낮다. 우리나라 여성이사 할당제에 아쉬운 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게 중요하다. 제도는 인식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촉진제가 될 수 있다.
이경미=실제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국내 100대 기업의 여성 사외이사 비율이 20%를 넘어섰다는 게 그 증거다. 2020년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여성이사 할당제가 도입되고, ESG 경영의 G(거버넌스) 항목에서도 이사회의 다양성이 강조되면서 여성 사외이사 선임은 가속화되고 있다. 이달 말에 대기업들의 주주총회가 끝나고 나면 분위기가 또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사회 다양성을 위해 2명 이상의 여성 사외이사를 선임하는 기업도 늘어날 전망이다.
―풀무원은 사외이사 8명 중에 여성이사가 3명이나 된다.
이지윤=2400개가 넘는 국내 상장 기업 가운데 여성 사외이사를 2명 이상 선임한 곳이 2%도 안 되는 상황이다. 풀무원처럼 여성 사외이사 비율이 40% 가까이 되는 기업은 드물다. 성별 다양성 면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여성이사가 1명일 때와 2명일 때 이사회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3명일 때는 또 달라진다. 다양한 관점의 질문, 의견이 힘을 얻고 영향력을 낼 수 있게 된다. 이사회의 다양성 확보라는 제도의 본래 취지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이사 비율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
―여성이사 셋이 함께 만들어낸 변화가 있다면.
심수옥=여성이 셋이나 되다 보니 이사회 때 아무래도 ‘젠더 관점’의 질문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어 이사회에 ‘인재 육성 전략’이 안건으로 올라오면 승진 대상자 중에 여성이 몇 명인지, 직급별로 성비 격차는 어떻게 되는지, 격차가 있다면 그걸 줄이려고 어떤 노력을 하는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있는지 이런 것을 자세히 묻게 된다.
이경미=이사회에 합류했을 당시만 해도 사업부장 중에 여성이 한 명도 없었다. 풀무원이 여성 직원이 많은 기업이고 다양성과 포용성 면에서 앞서가는 기업인데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전체 사업부장 7명 중에 여성이 3명이나 된다. 풀무원에는 여성 임원을 언제까지 몇 명으로 늘리겠다는 목표가 명확하게 세워져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한 실행 전략도 마련돼 있다. 여성 인재가 성장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데 우리 이사회가 분명히 기여했다고 본다.
이지윤=지난번 열린 이사회에서는 회사 내의 문서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젠더감수성에 맞게 바꾸면 좋겠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경영과 관련 없는 사소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견까지 잘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다른 기업들도 사외이사의 의견을 이렇게 적극적으로 청취하고 받아들이는 분위기인가.
이지윤=형식적인 이사회가 여전히 많다. 사전에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게 조율하려는 곳도 있다. 제도가 잘 돌아가려면 시스템이 좋아야 한다. 풀무원에서 여성이사 할당제가 잘 작동하는 이유도 이사회 시스템이 좋기 때문이다.
―시스템이 좋은지 아닌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이지윤=우선 이사회 산하 위원회가 얼마나 잘 설계됐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위원회는 기업 경영과 관련된 특정 영역을 면밀히 검토하고 논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사회 산하 위원회의 수가 적정하게 설정되어 운영될 때 운영의 효율성이 높아지고 지배 구조 수준도 향상된다. 풀무원의 경우 ▲경영위원회 ▲보상위원회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사외이사평가위원회 ▲감사위원회 ▲전략위원회 ▲ESG위원회 ▲총괄CEO후보추천위원회 등 위원회 8개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사외이사평가위원회’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위원회다. 사외이사를 비롯한 이사회 활동을 공정하고 체계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한다.
심수옥=이사회에서 사외이사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도 중요하다. 사외이사는 경영진과 관련 없는 외부 인사로 구성되는데, 대주주의 독단 경영을 차단하고 기업의 투명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풀무원의 경우 사외이사 비율이 73%(11명 중 8명)로 상장사 중에서 최고 수준이다. 국내 상장 기업 가운데 사외이사가 이사회 구성원의 과반수를 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경미=사외이사의 독립성과 기능이 잘 보장되는지도 중요하다. 풀무원에는 ‘선임사외이사제도’라는 게 있다. 선임사외이사는 사외이사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사외이사들만의 회의를 따로 소집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외부에서 사외이사들끼리 모여 회의를 하다 보니 더 자유롭게 의견을 낼 수 있다.
―여성이사 할당제는 목표라기보다는 수단에 가깝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기 위함일까.
이경미·심수옥·이지윤=기업의 핵심은 거버넌스이고, 거버넌스는 곧 이사회다. 이사회 운영 시스템을 잘 갖춘 기업이 전문성과 지식을 갖춘 여성이사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선임할 때 효율적이고 투명한 거버넌스를 이룰 수 있다.
김시원 기자 blindletter@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