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산하는 유산기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그린레거시클럽 운영
현재 55명 기부 약속
전 재산 기부는 ‘오해’
부동산·주식·미술품 등
다양한 자산 기부 가능
아버지는 몰랐다. 딸이 마흔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지, 또 유산을 사회에 환원할 마음을 먹었는지도. 지난 2019년 9월 요양병원에서 생활하던 강준원씨에게 수원시 공무원과 비영리단체 관계자가 찾아왔다. 외동딸이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과 함께 고인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딸 강성윤씨의 휴대전화 메모장에는 “재산은 어린이재단에 기부합니다”라는 14자의 유언이 남겨져 있었다. 유일한 가족이자 상속자인 아버지는 “모든 건 내 뜻이 아니고 내 딸이 그렇게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다”라며 동의했다. 유산 기부로 내놓은 사망보험금과 증권, 예금 일부는 총 4억4000만원이었다. 그의 유산은 지역아동센터 6곳과 그룹홈 1곳의 시설환경개선, 지역 아동들의 의료비와 보육비로 쓰였다. 아버지는 딸의 기부금에 대한 결과 보고를 받고 자신도 유산 9000여 만원을 기부했다. 이듬해 아버지는 딸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렇게 부녀(父女)는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유산기부자 모임인 ‘그린레거시클럽’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재단은 지난 2019년부터 유산 기부 진입 문턱을 낮추고 국내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해 그린레거시클럽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산 기부를 약속한 기부자는 55명. 올해만 13명이 가입했다.
부자 혹은 고령자의 영역으로 인식되던 유산 기부가 최근 확장되고 있다. 마땅한 자산을 형성하지 못한 2030세대도 보험 수익자를 자선단체로 변경하는 방식으로 동참하는 추세다. 특히 상속 재산의 일부만 사후 기부하도록 약정하는 사례가 늘면서 자선단체에 유산 기부 절차 문의도 늘고 있다.
유산 기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2030세대는 보험 기부 많아
유산 기부 개념은 우리 사회에 아직 낯설다. 상속 재산 전액을 기부해야 한다는 오해도 있다. 유산 기부는 생전에 상속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공익 목적으로 기부하기로 약정하는 것을 뜻한다. 현금이나 부동산, 주식, 보험, 미술품 등 다양한 자산 유형을 기부할 수 있다. 유족이 장례 조의금을 기부하는 경우도 포함된다.
유형이 다양해지면서 큰돈을 기부해야 한다는 인식도 조금씩 깨지고 있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유산 기부 업무를 담당하는 양태욱 대리는 “올해 제주에서만 조의금 유산 기부가 세 차례 진행됐는데, 규모는 각 1000만원 정도”라며 “고인이 평소 내비친 뜻을 이어가기 위해 유가족이 고인의 이름으로 기부를 진행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의 참여로 세대 확장이 이뤄지고 있다. 그린레거시클럽에 등록된 후원자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60대 이상 고령자이지만, 2030세대 9명이 잇따라 이름을 올렸다. 양 대리는 “기부하겠다는 의지는 크지만 당장 기부할 수 있는 자산이 없는 청년들은 주로 생명보험의 수익자를 재단으로 변경하거나 보유 주식의 몇 주를 기부하겠다고 약정하는 방식을 택한다”면서 “노후를 위해 자산을 써야 하는 기성세대에 비해 자산의 증가 가능성이 큰 청년 세대가 유산 기부에 관심을 갖는 건 기부 문화 확산에도 긍정적인 신호”라고 말했다.
전담팀 신설하고 내부 가이드라인 마련
국내 자선단체가 유산기부자를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도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가 1971년 유언으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고, 소설가 고 박경리 작가의 유가족은 2011년 고인이 남긴 현금 13억원을 서울대에 기부한 바 있다. 이처럼 유산 기부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모금단체에서는 기부자를 발굴하고 지원하기보다 접수 사례에 대응하는 분위기였다.
최근 몇 년 새 분위기가 바뀌었다. 재단마다 유산 기부 의사를 내비치는 문의가 잦아지면서다. 각 자선단체에서 전담팀을 신설하고 내부 가이드라인도 만들기 시작했다. 외부 전문가 집단과 협업하기도 한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경우 법률 자문은 김앤장 사회공헌위원회, 신탁계약업무는 하나은행과 함께 법적·행정적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자선단체 6곳의 유산 기부 담당 실무자들은 두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사례 공유 스터디를 진행한다. 기부자 사례를 공유하고, 실무 현장에서 발생하는 돌발 상황과 대처 노하우도 나누는 자리다.
그린레거시클럽의 문을 두드리는 문의는 연간 50건 수준이다. 이 가운데 실제 약정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20%대에 머문다. 양태욱 대리는 “가족의 반대로 인한 기부자의 변심이 대부분이지만, 재단에서 내부 가이드라인에 따라 기부자의 의사를 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번은 경남 사천에 사는 50대 남성께서 유산을 기부하고 싶다고 전화를 했어요. 직접 찾아뵙고 상담을 진행했는데, 기초생활 수급자셨어요. 그런데 보유한 아파트를 기부하겠다고 해요. 건강이 좋지 않아 치료비도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그간 이야기를 쭉 들어보니 미래에 대한 설계가 전혀 없었습니다. 기부받는 재단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지만 기부자의 상황을 우선으로 고려해 기부 의사를 재고해달라고 정중히 말씀드렸죠.”
“기부자 사후 분쟁 막으려면 유류분 제도 개선돼야”
기부자의 결심과 가족의 동의가 있다면 유산 기부는 순조롭게 이뤄진다. 기부자의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보통 3주 안에 모든 법적·행정적 절차를 마칠 수 있다. 다만 기부자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유가족 측이 ‘유류분 반환 청구 소송’을 제기할 때다. 민법은 피상속인이 유언 또는 증여에 의해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이른바 ‘유류분 제도’를 통해 기부자가 사망 1년 이내에 공증한 유산도 상속인이 일부 돌려받을 수 있다. 직계비속과 배우자는 법정 상속분의 절반, 직계존속과 형제·자매는 법정 상속분의 3분의 1을 유류분으로 보장받는다.
전문가들은 유류분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아 자선단체가 유산 기부를 받을 때마다 분쟁 가능성도 떠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유언자가 금융회사와 자산신탁계약을 맺고 자산관리를 위탁하는 경우에는 민법에 따른 유언을 남기지 않아도 유산 분배가 가능하지만, 이에 대한 재판부의 서로 다른 판례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상황이다. 가족 간 합의가 전제되지 않고선 언제든 분쟁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박훈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 교수는 “기부 전문가들은 유류분 제도 폐지나 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민법 전문가들은 유류분이 상속인의 권리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면서 “지금 상황에서는 기부자와 자선단체 모두 혼란을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미국과 영국 등 기부 선진국에는 유류분 제도가 없고, 기부자들도 생전에 유언장을 쓰는 계획기부를 실천하고 있어서 분쟁 가능성이 낮은 편”이라며 “법과 제도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남은 전 재산을 가족에게 남기는 것보다 사회에 일부 환원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일도 함께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더나은미래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