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1만 달러(1290만원)의 금 175g이 하루아침에 1억350만 달러(약 1335억원)가 됐다. 세계 난민의 날인 지난 20일, 뉴욕 헤리티지 경매에서 벌어진 일이다. 화제의 경매 물품은 러시아 반체제 언론인 드미트리 무라토프가 지난해 받은 노벨평화상 메달이다. 무라토프는 ‘노바야가제타’라는 언론의 편집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비리를 폭로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하다가 러시아 당국의 처벌 위협 속에 올해 3월 폐간됐고, 소속 기자 6명은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목숨을 내걸고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언론인으로서 노벨평화상을 받을 만하다. 그가 이 메달을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옥션에 내놓았고, 수익금은 유니세프에 전달돼 쓰일 예정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라 해도 많이 부러운 광경이다. 목숨처럼 영예로운 메달을 경매에 내는 것도, 그 메달 하나를 1억 달러에 사는 것도, 그 수익금이 난민 어린이를 위해 쓰인다는 것도 명분이 좋다거나 통이 크다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 장면에는 다양한 서사가 녹아있다. 독재와 전쟁을 일삼는 이들, 진실을 수호하는 이들, 그를 칭찬하는 이들, 전쟁의 피해로 부모와 일상을 잃어버린 난민 아이들,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위해 자기 명예와 재산을 기꺼이 내놓는 용기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는 따로 있다. 누군가의 눈물과 아픔과 진심이 담긴 진짜 삶의 이야기는 마음에서 마음을 타고 멀리멀리 흘러가는 동안 내내 그 울림이 살아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말하는 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듣는 귀’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실상 앞의 그 경매에서 내가 부러운 것은, 그곳에 듣는 귀를 가진 이들이 많았다는 지점이다. 그 정도의 금액은 한 번에 낙찰되지 않는다. 서로 경쟁적으로 입찰가를 부르며 상호 간에 공명할 때 금액이 올라가게 된다. 적어도 그 자리에는 서로 따뜻한 마음을 내놓겠다고 호기를 부리는 이들이 몇몇이 있었다고 보인다. 아무리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어도 자기 마음이 급하고 자기 사정에만 연연하는 이들에게는 소용이 없다. 남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는 그다음에 내가 할 말을 생각하느라 실제로 들리는 내용이 절반도 넘게 여과되기 일쑤다. 타인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호응하지 않으니 상대와의 교감은 어려워진다.
최근 우리 사회에도 선한 사회사업가들이나 혁신적인 기업가들이 늘고 있다. 각자 선한 동기가 있고 최선을 다해 좋은 임팩트를 내고자 서로 경쟁적으로 노력한다. 참 고무적인 일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내가 꽂힌 일에 심취하고 몰두하다 보니, 이해관계자를 돌아보고 실제 관련된 현장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서 함께 감동적인 변화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일이 드물다는 점이다. 갈수록 현장의 필요보다는 기부자가 원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경향도 있다. 의미 있는 사업을 하려면 상당한 재원이 필요하다. 비영리 단체들로서는 이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자산가들이 너그러운 후원자가 되어 현장과 공명하며 협력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함께 공명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공익을 추구하는 일은 제로섬 경쟁이 아니다. 간혹 선의의 경쟁을 할 때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모두가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드리나무, 작은 풀꽃, 버섯과 이끼도 살 수 있어야 ‘참 생태계’가 된다.
기부자가 자신의 관심과 욕구에 맞게 직접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깊이 관여하면서 주도성을 가져가는 건 낮은 수준의 필란트로피다. 더 높은 수준의 필란트로피가 되려면 다양한 현장의 이야기에 귀를 열어 그 필요를 살피고 교감하면서 다양한 주체들이 서로 다른 역할을 인정하고 상호 보완하며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건강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큰 손의 역할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내 것을 남을 위해 내어 놓을 때, 내가 차지할 것이 무엇인지 따지지 말자. 내 것이라 고집하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 놓는 오병이어(五餠二魚)와 이를 100배, 1000배로 부풀려내는 기적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이다.
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