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배려 없는 ‘스마트 세상’
최신 스마트폰·TV 돌출 버튼·음성지원 등 장애인 위한 배려 없어
오락·앱… 기능 넘치지만 버튼조차 찾기 힘들고 끄고 켜기만 겨우 가능
“나도 스마트폰 사고 싶어.”
서원선씨의 얘기에 이승철씨가 덧붙인다.
“스마트폰을 사는 게 아니라 아이폰을 사는 거지. 갤럭시는 사봐야 사용을 못 하잖아.”
원선씨와 승철씨는 시각장애 1급의 장애인이다. 눈앞에서 손을 흔들면 무엇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정도를 느낄 수 있고, 큰 물체의 형체와 색깔을 흐릿하게 알아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아이폰을 사용할 수 있을까.
보통 스마트폰은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작동한다. 화면에 버튼의 이미지가 나타났을 때 이미지를 건드리면 바로 다음 화면으로 연결된다. 이렇게 작동이 되면 시각장애인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다. 원하는 동작을 실행시키기도 전에 실수로 다른 동작을 실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철씨의 아이폰은 버튼의 이미지를 건드리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는 대신 음성안내가 나와 어떤 버튼을 만졌는지 알려준다. 이 버튼의 동작을 작동시키고 싶을 때는 화면의 어느 곳이건 두 번 두드리면 된다. 화면을 되돌리길 원한다면 세 번 두드리면 된다. 덕분에 승철씨나 원선씨 같은 시각장애인들도 아이폰을 사용할 수 있다. 아이폰이 채택하고 있는 운영체제인 iOS에서 가능한 작업이다. 갤럭시의 안드로이드 체제에서는 이런 작동이 안 된다.
2010년 기준으로 1급으로 등록된 시각장애인의 수는 3만3000명이다. 승철씨는 “3만3000명이 스마트폰을 사용한다면 이들은 모두 아이폰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기업에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소비의 폭이 제한된 장애인들에게도 안타까운 일이다.
1급 시각장애인인 신재은씨는 “스마트폰뿐만이 아니라 요즘 나오는 전자제품들을 사용할 수가 없어 바보가 된 느낌”이라고 했다. 신식 전자제품들의 ‘디자인’이 강조되면서 오히려 장애인들의 사용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기자는 재은 씨, 원선씨와 함께 전자제품 전문매장으로 가봤다.
제일 위층엔 요즘 광고가 한창인 텔레비전들이 있었다. 마중을 나온 매장 직원은 최신 모델에는 과거에 있던 모든 기능이 있다며 제품을 보여줬다. 600만원대의 삼성 스마트TV는 3D, 애플리케이션, 오락, 동영상 보기 등의 기능이 제공된다. 하지만 원선씨는 이 TV를 사더라도 켜고, 끄고, 볼륨을 높이거나 낮추는 기능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리모컨의 ‘메뉴’버튼을 누르자 다양한 기능을 나타내는 화면이 나왔지만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원선씨는 “화면의 글자들을 읽어주는 음성지원 정도만 돼도 이런 기능들을 대부분 다 활용할 수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사정은 570만원대의 LG 인피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매장 직원에게 혹시 점자로 된 사용설명서가 있느냐고 묻자 본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래층의 세탁기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의 버블과 LG의 트롬은 다이얼을 통해 세탁메뉴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이얼을 아무리 돌려도 지금 다이얼이 세탁, 탈수, 건조 등의 기본메뉴는 물론 울, 불림 등 어떤 동작 메뉴를 가리키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음성안내는커녕 메뉴들을 구별할 수 있는 점자 표시나 돌출점을 통한 표시도 없이 매끈했다. 전원을 켜는 버튼과 일시정지와 동작을 수행하는 버튼이 그나마 돌출식이지만 두 버튼이 똑같이 생겨 촉각으로는 구별할 수 없었다. 같은 층에 있던 냉장고도 마찬가지였다.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작동하는 매끈한 표면의 냉장고 앞에서 두 사람은 버튼조차 찾지 못했다.
전자레인지는 더했다. 전자레인지는 사고의 위험이 큰 가전제품이다. 특히나 장애인이 사용한다면 더 위험하다. 그러나 14만원에서 8만원대의 제품에서는 모든 버튼에서 그 버튼의 동작내용을 인식할 수 있는 장치가 전혀 없었다. 음성안내, 점자, 돌출점 표시가 모두 없었다. 일부 제품은 버튼이 매립되어 있어서 버튼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헛조작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었다. 적응이 되면 사용할만한 제품이라고 직원이 소개해준 것은 사용 시간을 다이얼식으로 표현해 조작이 간단한 6만원대 구형 제품이었다.
그나마 두 사람은 비데와 밥솥을 만나서 위안을 얻었다. 비데는 동양매직, 블루밍, 린나이의 제품들이 모두 전원, 정지, 건조, 비데, 세정 메뉴에 점자 안내를 삽입했다. 노비타의 제품만이 점자표시가 없었다. 밥솥도 음성안내가 되었다. 쿠첸과 쿠쿠에서 나온 전자밥솥들은 음성안내 기능이 첨가되어 있어 터치스크린 방식에서도 사용이 가능했다. 원선씨는 “삼성전자나 LG전자보다 밥솥을 만드는 회사가 기술력이 더 좋은 모양”이라며 헛웃음을 지었다.
최근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전자제품들이 모여 있는 매장에서는 시각장애인들이 혼자 힘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없었다. 설혹 제품을 구입한다고 하더라도 “같은 값으로 사고도 돈값만큼 활용을 못 하는 상황”이다. 혹시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기능이 단순화된 저가의 제품들이 있나 찾아봤지만 매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재은씨의 말처럼 “더 좋은 사양의 제품들이 나오지만 장애인들의 자립 생활은 더 힘들어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재은씨는 “기술적으로도 뒤처지지만 심리적으로도 위축된다”고 호소했다.
한국 _ 제품 표준만 제시 이행에 강제성 없어
미국 _ 보편적 설계 제품 구매 연방정부 의무로 규정
일상생활에서 장애인의 자립생활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생활에서의 자립도는 높다. 장애인들은 옷을 벗고 입는 동작(87.3%), 세수와 양치질, 화장실 사용(92%), 식사(94%) 등에서 완전자립을 이루고 있다. 물건 사기, 교통수단 이용하기, 근거리 외출하기, 전화 사용하기 등에서도 70%가 넘는 장애인들이 완전자립률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요즘 출시되는 가전제품 사용에 있어서는 활동보조인이나 가족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다.
시각장애인 연합회의 강완식 팀장은 “소비재를 생산하는 기업들이 보편적 디자인(Universal Design) 개념을 도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편적 디자인이란 소비제품, 주택, 도시환경 등이 노인, 장애인, 비장애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을 의미한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은 각종 재화 및 용역의 제공과 이용에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차별행위를 포괄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물품’에 대해 ‘동등한 수준의 편익’을 가져야 하고 이를 위반하는 것은 ‘차별’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속력 있는 지침이 없다. 지식경제부의 기술표준원은 조명, 소리, 글자표시 등 장애인과 고령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설계지침 관련 표준 20종을 보유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탕통, 소금통, 후추통은 내용물의 구별이 가능하도록 뚜껑의 형태를 달리하거나 표시를 해야 한다’는 등의 표준이 있지만 이들은 구속력이 없다. 표준원은 “표준을 제시할 뿐 기업에 강요할 수는 없고, 제품에 적용되는 표준은 전 세계의 표준이 진행되는 상황을 보며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는 사이 대표적인 가전회사인 삼성전자와 LG전자 모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된 2008년 이후의 제품들에서조차 보편적 디자인과 관련한 제품 디자인의 가이드라인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로 지금에 이르렀다.
미국은 재활법 508조에 의해 ‘해당 기관에 과도한 부담이 부과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보편적으로 설계된 전자기술의 사용을 연방정부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즉 공공조달을 통해 보편적으로 설계된 전자제품을 구매해야 하는 의무의 근거를 둔 것이다. 기업에 강요를 하지 않더라도 보편적 디자인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