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발언대] 그림자 속의 아이들, 영케어러가 마주한 현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흔히 생각하는 모습은 친구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가정의 보호 속에서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성장과 배움의 시기에 오히려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짊어진 아동·청소년과 청년들이 있다. 이른바 ‘영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청년이다.

질병, 장애, 고령, 정신건강 문제나 중독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돌보는 이들은 가사와 병원 동행, 일상생활 지원은 물론 생계를 위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돌봄 부담은 학업과 진로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적 관계의 단절과 심리·정서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나아가 청년기의 자립 기반을 약화시키고, 빈곤과 돌봄 부담이 반복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도 가족돌봄청년을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한 정책을 확대해 왔다. 보건복지부는 실태조사를 바탕으로 가족돌봄청년 맞춤형 지원과 일상돌봄 서비스 등을 추진하고 있다. 학교와 병원 등 지역사회 일선 기관을 통한 조기 발굴과 지원 연계의 필요성도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영케어러가 자신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못한 채 가족 안에서 돌봄을 감당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원이 필요한 대상으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도움을 요청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돌봄을 개인과 가족의 책임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지역사회와 사회 전체가 함께 책임지는 체계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 현장에서 체감하는 영케어러 지원의 필요성

지역사회 복지 현장에서 영케어러를 만나면 이들이 감당하는 돌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영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지원이 필요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영케어러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영케어러는 겉으로는 별다른 문제 없이 학교생활이나 일상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족을 돌보는 일을 당연한 책임으로 받아들이거나 주변에 어려움을 알리지 못하면서, 정작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공적 지원체계와 연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학교와 병원, 행정복지센터, 사회복지관 등 지역사회 곳곳에서 영케어러를 조기에 발견하고 필요한 지원으로 연결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둘째, 돌봄 부담이 아동·청소년과 청년의 성장과 자립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지속적으로 감당하면 학업과 진로 선택, 사회적 관계 형성 등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삶뿐 아니라 향후 자립과 사회참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가족을 돌보는 청년에게는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 학업과 진로, 심리·정서적 지원, 휴식 등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종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셋째, 영케어러뿐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영케어러가 가족의 돌봄을 전담하는 상황에서는 돌봄을 받는 가족 역시 충분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영케어러 개인에 대한 지원만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돌봄 대상 가족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연계하고, 가족돌봄청년에게는 휴식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한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 사회복지관이 바라본 영케어러 지원의 핵심

영케어러에 대한 지원은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아동·청년을 찾아 지원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핵심은 영케어러를 조기에 발견하고 가족의 돌봄 부담을 줄여,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이러한 점에서 지역주민과 가까운 생활권에 위치한 사회복지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첫째, 영케어러의 ‘오늘’을 위한 쉼을 마련해야 한다. 영케어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돌봄 부담을 덜어주는 것만이 아니다. 친구를 만나고, 공부하고, 진로를 고민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일상의 시간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복지관은 당사자의 상황과 욕구를 파악해 정서·학업·진로 지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돌봄 대상 가족에게 필요한 돌봄·의료·생활지원 서비스를 연계할 수 있다. 가족에 대한 지원을 통해 영케어러의 돌봄 부담을 실질적으로 줄이고, 그만큼 자신의 삶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지역사회 복지의 중요한 역할이다.

둘째, 가족 전체를 살피는 통합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영케어러 문제는 한 사람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결하기 어렵다. 가족의 건강과 경제적 어려움, 주거와 돌봄 문제, 청년의 학업과 진로 등 여러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관은 사례관리를 통해 가구가 겪는 복합적인 어려움을 파악하고, 필요한 경우 지방자치단체와 학교, 병원, 지역 내 민간자원 등을 연계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특히 제도적 기준만으로는 발견하기 어려운 가구를 지역사회 안에서 조기에 찾아내고 지원체계로 연결하는 것은 생활권에 기반한 사회복지관이 수행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이다.

◇ 돌봄은 함께 나누고, 꿈은 키우는 대한민국을 향해

‘영케어러의 오늘에 쉼표를, 내일에 날개를’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영케어러에게 어떤 지원을 제공해야 하는지가 담겨 있다. 가족을 돌보는 책임 때문에 자신의 삶을 뒤로 미루고 있는 아이들과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일회성 지원이 아니다. 돌봄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지속적인 사회적 지원이다.

한국사회복지관협회는 전국 사회복지관과 함께 지역사회 곳곳에서 영케어러를 조기에 발견하고, 당사자와 가족에게 필요한 지원이 연결될 수 있도록 현장의 역할을 강화해 나가고자 한다. 또한 어린이재단 영케어러추진협의회를 비롯한 관련 기관·단체와 협력해 영케어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이고, 지역사회 중심의 발굴과 지원체계가 더욱 촘촘하게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가족을 돌보느라 자신의 오늘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잠시 쉬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자신의 꿈과 미래를 스스로 그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영케어러의 오늘에 쉼표를 더하고, 내일에는 다시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함께 돌봄의 책임을 나누어야 한다.

김건태 한국사회복지관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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