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센터장님, 제 꿈이 뭔지 아세요? 대기업 취업도, 세계 여행도 아니에요. 그저 당장 내일 병원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알람을 끄고 하루만 푹 자보는 거예요. 저의 20대는 이미 엄마의 병간호에 저당 잡힌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의 산업 수도라 불리는 울산의 화려한 불빛 이면에는, 이처럼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홀로 숨죽여 우는 청춘들이 있다. 한창 미래를 향해 달려가야 할 10대와 20대, 길게는 3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시계는 아픈 가족의 투병 생활과 생계의 굴레에 맞춰진 지 오래다.
질병, 장애, 정신질환 등을 겪는 가족을 홀로 돌보며 가사 노동과 생계까지 책임지는 이들을 우리는 ‘영케어러(Young Carer, 가족돌봄아동·청년)’라 부른다. 국내 규모만 약 10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이들은 오랫동안 완벽한 ‘투명 인간’이었다. 과거 대가족이나 지역 공동체가 나눠 맡던 돌봄의 짐이 핵가족화와 1인 가구 증가 등 사회 구조의 변화 속에서 준비되지 않은 어린 자녀에게 독박 돌봄으로 전가됐고, 이를 ‘효행’이나 ‘가족의 도리’로만 포장해 왔기 때문이다.
영케어러가 겪는 위기는 다중적이고 파괴적이다. 간병과 가사에 시달려 지각과 결석이 잦아지고 결국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또래들이 취업 스펙을 쌓을 때 당장 병원비를 벌기 위해 단기 알바를 전전하고, 질 좋은 일자리 진입 시기를 놓쳐 빈곤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사회적 고립 속에서 겪는 우울감과 무기력은 벼랑 끝에 선 청년들을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기도 한다. 영케어러 문제는 단순한 안타까운 사연이 아닌, 심각한 사회적 손실을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다.
◇ ‘기다리는 복지’에서 ‘찾아가는 연대’로
다행히 지난 2026년 3월,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며 국가 차원의 지원 근거가 마련됐고, 그 전달체계의 최일선에 ‘청년미래센터’가 출범했다. 청년미래센터가 목도한 가장 뼈아픈 진실은 ‘진짜 위기에 처한 이들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당연한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에 먼저 관공서의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센터의 핵심 가치는 서류를 들고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복지’에서 벗어나, 숨어 있는 청년을 찾아내는 ‘능동적이고 선제적인 발굴’에 있다.
우리는 관내 사회복지시설, 지역사회보장협의체, 행정복지센터, 교육청, 학교, 의료기관, 정신건강복지센터 등과 긴밀하게 연대해 영케어러 발굴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결석이 잦아진 학생이나 보호자란에 대신 서명하는 어린 자녀를 촘촘한 안전망을 통해 조기 발견하는 것이다. 발굴 이후에는 밀착 사례관리의 5대 서비스(교육, 금융, 주거, 법률, 일자리) 연계를 통해 청년들의 ‘시간’을 되찾아주고, 맞춤형 진로 컨설팅과 자기돌봄비를 지원해 이들이 온전히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통합 지원의 허브’가 될 것이다.
◇ ‘통합 거버넌스’ 구축과 사회적 책임
이러한 지원 체계의 안착을 위해 오는 10월 29일 ‘국제 돌봄의 날’을 기점으로 일주일간, 아시아 최초로 ‘제1회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Young Carers Week)’가 열린다. 해외 선진국은 이미 오랜 기간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 왔다. 영국의 ‘Young Carers Action Day’는 돌봄으로부터 완벽하게 단절된 ‘휴식(Give Me a Break)’을 제공하며, 호주의 ‘National Carers Week’는 학비 보조금 지원과 함께 의사당 행사로 이들의 헌신을 국가가 예우한다. 이번 ‘제1회 대한민국 영케어러 위크’ 역시 토크콘서트와 공동선언문 발표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강력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영케어러 문제는 보건, 복지, 교육, 의료, 고용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다차원적 문제다. 교육청·학교의 조기 발견 매뉴얼, 병원 내 미성년 주 보호자 자동 연계 시스템, 영케어러가 근무할 수 있는 맞춤형 일자리 정책 등 단편적 지원을 넘어선 정책이 수반돼야 한다.
◇ 돌봄은 함께 나누고, 꿈은 이루는 대한민국 실현
돌봄은 개인이 짊어져야 할 고립된 고통이 아니라 국가와 공동체가 함께 나누어야 할 지속 가능한 사회적 어젠다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미래를 갉아먹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도 수많은 지붕 아래서 가족의 병상을 지킬 아동·청년들에게, 결코 혼자가 아니며 우리가 그 짐을 함께 나누겠다고 전하고 싶다. 청년미래센터는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영케어러들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 자신만의 인생 궤도를 항해할 수 있도록, 가장 밝고 든든한 연대의 등대가 되겠다.
정치락 울산청년미래센터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