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리한 비영리] 정치는 흔들려도, 시민사회는 단단하게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민사회는 위태로워진다. 예산이 끊기고, 사업이 중단되고, 단체는 해산된다. 지난해 사회적경제 분야 예산은 대폭 삭감돼 현장이 큰 타격을 입었다. 2024년 고용노동부의 사회적기업 지원 예산은 전년(2022억 원) 대비 60% 줄어든 786억 원에 그쳤다. 사회적기업가 육성 사업 예산은 411억 9000만 원에서 88.7%나 삭감돼, 고작 46억 7000만 원이 배정됐다.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육성 예산도 69억 6000만 원에서 26억 9000만 원으로 줄었고, 중소벤처기업부의 사회적경제 기업 성장 지원 예산은 아예 0원이 됐다.

지자체도 다르지 않았다. 2022년 12월 서울시의회는 ‘서울특별시 마을공동체 활성화 지원 조례 폐지조례안’을 통과시켜 마을공동체사업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현재 마을공동체사업과 주민자치 지원은 서울시에서 사실상 종료됐다. 정책은 곧 사라졌고, 현장에서 쌓은 성과도 함께 무너졌다.

결국 피해는 시민들에게 돌아간다. 장애인, 고령자, 한부모 등 취약계층을 고용하던 사회적기업들은 인건비 보조가 끊기면서 존폐의 기로에 섰고, 지역사회에서 이웃을 연결하던 마을 활동가들은 공간을 잃고 흩어졌다. 마을공동체 활동을 통해 대안을 만들어가던 지역의 생명력이 일순간에 침잠했다. 시민의 일상 속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던 작고 지속적인 실천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치 환경은 시민사회의 존속 여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사회의 대안을 만들고, 일상 속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시민사회는 정치가 흔들리거나, 정권의 변화에 따라 출렁인다. 문제는 구조다. 제도와 법률이 뒷받침되지 않는 시민사회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사회적 신뢰의 약화, 시민 참여의 위축, 사회 혁신의 퇴보, 민주주의의 퇴행으로 이어진다.

◇ 시민사회기본법을 통해 만드는 민주주의의 뿌리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시민사회를 지탱하는 기본법의 제정이다. 시민사회기본법은 시민사회 활성화를 국가의 책무로 명시하고 정부와 시민사회 간 협력 원칙, 기본계획 수립, 전담기구 설치, 제도 개선, 공익활동 지원 인프라 등을 포괄하는 법적 틀을 말한다. 현행처럼 대통령령 한 줄로 위원회가 사라지고 예산이 뒤바뀌는 구조에서는 지속가능성은 없다.

시민사회의 제도화를 통해 공익활동의 자율성과 연속성을 보장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국제적 흐름이다. 영국은 2010년 ‘빅 소사이어티(Big Society)’ 정책을 통해 시민사회의 공적 역할을 제도화했다. 자선위원회(Charity Commission)는 정부와 독립된 기구로서 자선단체의 공익성을 심사하고 등록·감독하는 역할을 맡아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동시에 뒷받침하고 있다.

프랑스는 2014년 ‘시민사회 헌장(Charte des engagements réciproques)’을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 간 상호 책임과 협력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 헌장은 시민사회에 대한 정부의 신뢰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공동 정책 수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시민사회기본법은 소수의 단체를 위한 법이 아니다. 시민이 일상에서 자유롭고 책임 있게 사회적 역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민주주의의 안전망이자, 공동체 회복의 조건이다.

◇ ‘독립성’과 ‘지속가능성’이라는 날개를 달고

시민사회 정책은 각 부처에 흩어져 있고, 담당자도 정권에 따라 수시로 바뀐다. 등록과 관리는 제각각이고, 수많은 단체들이 행정적 혼란을 겪는다. 이처럼 분절된 체계로는 사회변화를 추진할 역량을 쌓기 어렵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시민사회를 총괄하고 정책 연속성을 확보할 독립적 전담기구가 필요하다. 단순한 부처 소속이 아닌, 대통령 직속 또는 국무총리 산하의 합의제 기구로서 시민사회의 전체를 조율할 체계가 요구된다.

해외에서는 이미 이러한 독립적 기구들이 제도화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영국의 자선위원회는 자선단체의 투명성과 공익성을 감독하며 정부로부터의 정치적 개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호주는 ACNC(Australian Charities and Not-for-profits Commission)를 통해 비영리단체의 등록, 보고, 감독을 일원화하여 안정적인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의 공익인정위원회 역시 공익법인의 자율성과 책무성을 보장하며 민관 간 신뢰를 제도적으로 구축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들 사례는 분명한 메시지를 준다. 시민사회의 지속성과 자율성은 독립성과 제도적 기반이 확보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도 더 이상 시민사회를 부처별 규제로 다루는 체계를 벗어나야 한다. 정부와 분리된 독립기구를 통해 정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 시민사회의 연속성을 보장함으로 사회의 발전과 변화를 지속해야 한다.

◇ 낡은 규제를 풀고 지속가능한 기반을 만드는 길

시민사회가 지속적으로 활동하려면, 규제를 풀고 재정과 인프라 기반을 함께 강화해야 한다. 현재 시민사회 활동과 관련된 대표적 법률로는 기부금품의 모집 및 사용에 관한 법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보조금과 관련된 법률, 민법상 비영리법인 설립 규정, 비영리민간단체 지원법 등이 있다. 이들 법률은 시민사회를 위한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한다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복잡한 허가 절차와 불합리한 제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부금 모집을 위한 허가제는 현실과 맞지 않는 부담이 되고 있다. 보조금 정산 역시 지나치게 경직돼 있고, 결과 중심의 유연한 기준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비영리법인 설립 역시 인가제가 아닌 준칙주의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자율성과 공공성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 균형 있게 조율되어야 할 원칙이다.

정부 예산에만 의존하지 않고, 시민공익기금·사회혁신기금·지역재단 등 다양한 재정 기반을 제도화하는 일도 시급하다. 지역 시민사회가 공간·인력·데이터 등 핵심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공공 인프라도 함께 조성해야 한다. 이는 정권 변화 속에서도 시민사회가 현장성과 자율성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토양이 된다.

◇ 시민의 자리를 제도의 날개 위로 올려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불평등, 기후위기, 지역소멸, 고립 등 복합위기 속에 놓여 있다. 이런 문제는 결코 정부 혼자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정부가 손대기 어려운 일상의 균열과 사각지대를 메우는 일은 시민사회와 비영리 부문이 더 적합한 주체일 수 있다.

시민사회 즉 사회적경제, 마을공동체운동, 그 밖의 다양한 비영리 활동은 오늘날의 위기에 대한 대안적 해법을 실험하고 실천하면서 축적한 경험의 집합이다. 이들은 단순한 ‘민간 활동’이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탄력성과 민주주의의 지속성을 떠받치는 사회변화의 주체다. 공공의 정책에 참여하는 협력자이자 파트너이기도 하다.

이 시민사회를 법적으로 뒷받침할 기반이 없다면, 그 축적된 경험과 실천은 사라지고, 사회는 다시 퇴보할 것이다. 정치는 흔들려도, 시민사회는 단단해야 한다. 다음 세대로 이어질 공동체의 토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제도 위에 세워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오는 6월 3일, 한국 사회는 다시 한번 민주주의의 시험대 위에 오른다. 지난 수개월간 한국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던 막장 드라마를 웰메이드 드라마로 바꿀 열쇠는 우리에게 있다.

김진아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

필자 소개

아름다운재단에서 15년간 근속하고 2023년 내부선발 1호 사무총장이 되었습니다. 공익활동을 지원하고 건강한 기부문화를 확산하는 아름다운재단의 사회적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도록 전략적 도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난제’가 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다자간의 협력이 절실하다는 문제의식 아래 거버넌스에 대한 연구도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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