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나은미래x굿네이버스 공동기획]
아동학대 대응 최우선 과제는?
A(16)양은 퇴원을 앞두고 있다. 극심한 강박과 불안 증세로 지난 6개월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최근 정서적 안정을 되찾으면서 주치의와 퇴원 시점을 논의하고 있다. 웃음이 많아진 그의 얼굴에도 문득 그늘이 드리울 때가 있다. 퇴원 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A양은 아동학대 피해자다. 평범한 고등학생이던 A양을 아동학대 피해자로 보호하게 된 건 지난 2월부터다. 당시 경기 용인의 한 지구대로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랑 크게 말다툼을 하다 심하게 맞았어요. 지금 엄마가 집을 비웠거든요. 빨리 좀 와주세요.” 앳된 여성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신고자는 A양이었다.
경찰은 아동학대전담공무원과 즉시 현장으로 출동했다. 조사 결과 아동학대 정황이 발견됐다. 한부모 가정에서 자란 A양은 친모와 지속적인 갈등을 겪어왔다고 진술했다. 과거에는 체벌을 당했고, 신고 하루 전에는 친모와 다툰 끝에 충동적으로 투신자살을 시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난간에 다리가 걸렸다”며 “그 모습을 본 엄마는 ‘이럴 바엔 죽어라’라고 말한 뒤 집을 나갔다”고 말했다. 신고자의 얘기를 들은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은 아동의 심리적 불안 증세로 원가정 보호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A양을 용인에 있는 학대아동피해쉼터로 보냈다. 하지만 쉼터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고, 결국 지난 5월 심리 치료를 목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아동학대 피해자를 지원하는 경기용인아동보호전문기관의 오세인 상담원은 “이번 사건의 경우 학대 피해자가 심리적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1년 가까이 걸렸다”면서 “아동학대 사건 대응은 장기적으로 이뤄지며 학대 피해 아동쉼터전문 요원, 아동학대전담공무원, 아동보호전문기관(이하 아보전) 상담원 등 사건 대응에 투입되는 이해관계자도 많다”고 했다.
민간의 힘… 아동학대 특례법부터 공공화 사업까지
아동학대 사건에 공공과 민간이 업무를 나눠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조사부터 사례 관리까지 전적으로 민간의 몫이었다. 지난 2013년 소풍 가고 싶다는 여덟 살 의붓딸을 계모가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울산 여아학대 사망 사건’과 부모의 학대 끝에 초등생이 장 파열로 숨진 ‘칠곡 아동학대 사망 사건’이 두 달 사이 잇따라 발생하자 아동보호전문기관은 대규모 아동 옹호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이듬해 ‘아동학대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정을 이끌었다. 지난 2020년 생후 16개월 입양 아동이 학대로 숨진 ‘양천 아동학대 사망 사건’이 발생하자 민간 단체들은 아동보호체계를 재편하고, 아동 복지 서비스 전문성을 향상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민법상 친권자의 징계권을 삭제하고, 재학대를 예방하는 ‘즉각분리제도’ 등을 시행했다.
문제는 아보전 상담사의 현장 조사 업무가 공무 수행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 때문에 조사 과정에서 보호자와의 갈등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동학대 예산 부족과 만성적인 인력 부족도 초기 대응을 어렵게 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는 2020년 ‘아동학대조사 공공화사업’을 시작했다. 아동학대 신고 접수 시 현장 조사에 전담공무원과 경찰 등 공공 인력을 투입하는 제도다.
아동학대조사 공공화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건 아동 권리 전문 NGO다. 굿네이버스는 지난 2014년 ‘아동학대 예방 및 보호를 위한 아동보호체계의 개선 방안 연구’를 통해 아동학대가 발생했을 경우 공공기관에서는 조사를, 민간에서는 사례관리를 담당하는 기능 분리 모형을 제시했다. 민간 단체의 정책 제언이 공공화사업으로 실현된 것이다.
정부는 사업 시행과 동시에 내년 9월까지 3년의 유예기간을 뒀다. 이 기간에 아보전 상담원들은 전담공무원들의 업무를 지원하고 보완할 수 있다. 업무가 자연스레 교차할 수 있도록 일종의 적응 기간을 둔 셈이다. 유예기간이 끝나는 내년 10월 1일부터는 공공과 민간이 완전히 이원화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만성적인 인력난… 아동학대 대응 체계 무너질라
아동보호체계 전환을 1년 정도 앞둔 지금, 현장 관계자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남았다고 지적했다. 지난 4일 서울 영등포구 굿네이버스 사무실에서 만난 김미호 아동권리사업본부장과 고기증 아동권리사업팀장은 “예전부터 지적된 인력난, 예산 부족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공공화사업을 정착시키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아동권리보장원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전국 81개 아보전의 상담원은 총 1113명으로 집계됐다. 아보전 상담원 수가 매년 늘고 있지만, 아동학대 발생 건수의 증가 폭이 더 크다는 게 문제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1년 아동학대 주요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동학대 사례는 총 3만7605건이었다. 전년(3만905건)보다 약 21.7% 증가한 수치다. 10년 전(2012년 6403건)의 6배 가까이로 폭증했다.
상담원 한 명이 담당하는 아동학대사례는 한 해 평균 34건에 달했다. 전국 17개 시도별로 살펴보면, 울산 지역이 연간 83건으로 가장 많았다. 서울(32건)과 경기(37건)의 2배를 훌쩍 웃도는 수준이다.
수년째 제자리걸음인 아동학대 관련 예산도 문제다.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내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안을 보면 ‘아동학대 예방 및 피해 아동 보호’ 예산은 올해 381억2800만원에서 2023년 413억500만원으로 늘어 예산 증가율이 8.3%에 그쳤다. 복지부는 당초 527억9900만원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미호 본부장은 “아보전 상담원의 연봉은 신입 기준으로 약 3300만원 수준인데, 정부 예산만으로는 경력에 따른 연봉 증액이 어려운 실정”이라면서 “경력에 부합하는 연봉을 지급하기 위해 아보전을 위탁 운영하는 비영리 법인들이 추가 비용을 충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굿네이버스의 경우 규모가 큰 법인에 속해 급여 보전 비용으로 일정 금액을 부담하고 있지만, 영세한 법인들은 이마저도 힘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명숙 상지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학대 대응은 결국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데, 여전히 현장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고 말했다. “아동학대 대응은 기피가 굉장히 심한 업무예요. 사건이 언제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24시간 대기해야 하고, 전문성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보전 상담원과 아동학대전담공무원을 위한 탄력근무제, 심리적인 보상 체계가 없기 때문에 이탈하는 사람도 매우 많아요. 업무 강도가 높으니까 지원자도 많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은 공공과 민간의 유기적인 네트워크 구축 필요성도 강조했다. 고기증 팀장은 “아동보호체계가 전환되는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지역사회 내 공공과 민간의 유기적 연계”라면서 “미국에서는 민간과 공공이 마주 앉는 ‘전환회의 모델’이나 학대 가정까지 포함한 3자 간 회의인 ‘전환미팅 모델’ 등을 시행하고 있는데 국내에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는 아동학대 이렇게 대응한다
이웃나라 일본은 기초자치단체인 시정촌(市町村) 차원에서 요보호 아동 대책 지역 협의체를 두고 아동학대에 대응하고 있다. 협의체의 중심은 아동가정지원센터다. 민간 기관인 아동가정지원센터는 한국의 아동 보호 전문 기관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협의체에는 아동가정지원센터뿐 아니라 아동복지 관련 기관, 보건 의료 기관, 교육 기관, 사법 기관, 자원봉사자, NPO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관여하고 있다. 여러 공공 기관과 민간 기관은 유기적으로 네트워킹하고, 아동학대가 발생하면 즉시 논의에 돌입해 전 단계에서 협업한다.
아동학대 대응에서 공공의 힘을 실어주기 위해 미국의 경우 정부가 강제권을 갖기도 한다. 학대행위자가 가정 부모 교육, 약물 중독 치료, 가족 보존 프로그램 등 정부에서 지원하는 아동학대사례 맞춤형 서비스를 거부할 시 법원이 벌금형이나 구금형을 부과할 수 있게 돼 있다.
한국도 학대행위자가 아보전 사례 관리 과정에서 조사나 협조를 거부하면 지자체가 행정처분으로 과태료를 물릴 수 있다. 문제는 과태료 처분이 단 한 번도 이행된 적 없다는 것이다. 고기증 팀장은 “아동학대 대응 매뉴얼에 과태료 처분과 관련한 내용이 명시돼 있지만, 지자체에서는 ‘잘 설득하라’ ‘다시 한번 가정을 방문하라’ 식으로 대응한다”며 “이런 경우 아보전이 학대 사건에 개입하기 어려워 상담 업무에 난항을 겪는다”고 말했다.
박명숙 교수는 “아동보호체계에서 공공의 역할 비중이 커지는 건 굉장히 반가운 일”이라면서도 “전반적인 하드웨어, 즉 큰 체계를 마련해 놓았다면 이제는 이러한 체계가 원활히 작동할 수 있도록 세부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인력난, 예산 부족 등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아동 권리 증진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해 아동보호체계가 국내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수연 더나은미래 기자 yeo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