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박중열 제리백 대표
매일 10kg의 물통을 머리에 이고 흙길을 걷는 아이들이 있다. 그날 마실 물을 얻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손이 자유롭지 못해 자주 넘어지기도, 다치기도 한다. 차가 다니는 길이라 교통사고의 위험도 있다. 아프리카 우간다 아이들의 일상을 알게 된 박중열(43)씨는 생각했다. ‘어린이가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물을 나를 순 없을까?’
박씨는 작은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제리캔을 담을 수 있는 가방 ‘제리백’을 만드는 사회적기업이다. 상품 이름과 회사명이 같다. 제리캔은 아프리카에서 물을 나르기 위해 사용하는 플라스틱 물통이다. 물통을 담아 어깨에 멜 수 있는 배낭 제리백 덕분에 우간다 아이들의 두 손이 자유로워졌다. 어두운 곳에서도 밝게 빛나는 반사판이 가방 앞면에 붙어 있어 운전자 눈에도 잘 띄게 됐다.
제리백에서는 판매용 가방과 기부용 가방을 제작한다. 소비자가 가방을 1개 구입하면 우간다 아이들에게도 가방 1개가 기부되는 ‘바이 원, 기브 원(BUY 1, GIVE 1)’ 방식이다. 제리백이 설립된 2014년부터 작년까지 우간다 아이들에게 전달된 제리백은 1만 3000여 개. 지난달 27일 서울 성동구 성수동 제리백 매장에서 박 대표를 만났다.
우간다 아이들의 ‘안전’을 디자인하다
-제리백의 대표이자 디자이너이기도 하다고.
“디자인을 전공해 2009년까지 한국의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디자인을 공부하며 늘 내 디자인이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길 바랐다. 2010년 핀란드 알토 대학교에서 신설한 ‘창의적 지속가능성’ 대학원 과정에 진학했다. 사회적으로, 환경적으로, 윤리적으로 지속가능한 디자인에 대해 포괄적으로 공부할 수 있겠구나 싶어 유학길에 올랐다. 제리백은 대학원 논문 주제를 선정하기 위해 방문했던 우간다에서부터 시작됐다.”
-왜 우간다였나.
“대학원 수업에서 배우는 사회문제에 제3세계 이슈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다. 제3세계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해보고 싶었다. 내 생각을 말하고 다니니 우연한 기회로 핀란드에 있던 우간다분을 소개받게 됐다. 비영리조직 활동을 위해 핀란드로 넘어왔던 사람인데 내 프로젝트를 굉장히 응원하면서 우간다를 추천했다.”
-아이들의 식수 운반 문제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에 처음 우간다에 갔다. 2개월쯤 지났을까.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무더운 날씨에 낯선 음식을 먹어 탈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에 가니 백혈구 수치가 높아졌다는 진단을 받았다. 대체로 깨끗하지 못한 물을 지속적으로 사용하거나 마시면 걸리는 병이라고 했다. 나같이 건강한 성인도 물 때문에 질병을 앓을 수 있구나, 크게 놀랐다. 그때부터 우간다 물 문제에 더욱 집중하게 됐다. 특히 아이들이 힘들게 물을 운반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물을 긷는 것은 보통 아이들의 몫인가.
“그렇다. 10세 정도의 아이들이 매일 무거운 제리캔을 손에 들거나 머리에 이고 장시간 걸어야 한다.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자주 다치기도 하고, 차 사고도 났다. 그런 불편과 위험은 디자이너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해결안을 고안했나.
“물통을 담을 가방을 만들어 아이들의 두 손을 자유롭게 해주는 게 사소하지만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과정에 지역 주민들도 참여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했고, 우간다 현지 스튜디오를 만들어 우간다 여성들에게 가방 만드는 일자리를 제공했다. 이후 시행착오를 거쳐 우간다에서는 현지에 기부되는 가방을 전문적으로 만들고, 한국에서는 여러 디자인의 판매용 가방을 생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현지 스튜디오를 운영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직원은 몇 명인가.
“국내 제리백 스튜디오는 나를 포함해 6명, 우간다 스튜디오는 12명이 일하고 있다. 현지에 있는 생산직이 10명, 관리직이 2명이다. 대부분의 직원은 많게는 6~7년 동안 일을 해왔다. 초창기에는 봉제 기술이 있는 여성 두 분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점점 딸, 지인, 친척들을 데려와 기술을 배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기 공급이 안 좋을 때 비상용으로 사용하려고 뒀던 수동 재봉틀을 가지고 배울 수 있게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체적으로 초급·중급·고급반으로 나눠 서로 기술을 알려주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직원분들과 오래 함께하다 보니 유대감도 크다.”
-우간다 현지 스튜디오와 소통은 어떻게 하나.
“평소에는 온라인 메신저를 이용해 실시간으로 소통한다. 날마다 메신저의 굴레 속에서 살고 있다(웃음).”
물통 담는 가방에서 꿈 담는 가방으로
-제리백 디자인과 소재에 대해 설명하자면.
“물통을 운반하는 가방이기에 방수 기능이 가장 중요했다. 사고의 위험을 줄이려면 운전자 눈에 잘 띌 수 있는 원색이 좋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운송 비용까지 고려했을 때 가장 적합한 소재는 타폴린이었다. 포장마차 천 같은 소재다. 이후 피드백을 받아 야간 교통사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두울 때 빛이 나는 반사판도 부착했다. 제품 종류도 늘렸다. 메신저백, 백팩 등 다양한 소재와 디자인의 가방이 있다. 빛 반사 스트랩, 파우치, 키링, 여권 케이스, 카드 홀더 같은 액세서리도 판매한다.”
지난해 제리백에서 판매된 가방은 총 6700개. 제리백 운영 시스템에 따라 우간다 현지에도 6700개의 가방이 기부될 예정이다. 이 가방은 우간다에서 물통을 담는 용도로 사용되지만, 책가방으로 활용하는 아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제리백을 책가방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을 변경 중이라고.
“처음에는 제리백 사용 용도가 본래 의도와 멀어지는 것을 문제로 인식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제리백을 책가방으로 쓰면서 학교 출석률이 높아지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리백이 또 다른 긍정적인 효과를 만들 기회라고 생각했고, 보행 안전 기능도 높인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였다. 2주 전 해외 펀딩을 통해 최초 공개했다.”
-제리백을 운영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사업 초창기에 처음으로 제리백 제품을 100개 구매해 준 단체가 있었다. 덕분에 우간다 우물가에서 직접 아이들을 찾아다니며 가방을 전달할 수 있었다. 다음 날 제리백을 멘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왔다.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너무 고맙다고, 정말 가방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이의 가방에는 물통이 있었고 그 위에 꽃이 놓여 있었다. 손이 자유로워지니 물을 담아오는 길에 꽃을 따고 놀았던 것이다. 그때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바꿀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면 어떤가. 누군가의 삶에 조금의 변화라도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닌가.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제리백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간다 현지 스튜디오가 스마트 디자인 학교로 거듭나길 바란다. 현재 우간다 스튜디오는 기술을 익히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고, 일자리와 수익을 창출하는 일종의 디자인 학교 같은 느낌이 있다. 현지 직원들이 제리백을 만들면서 기술 역량을 키우고, 나중에는 독립해 스튜디오를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다. 제리백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자인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소비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가 됐으면 한다.”
양윤선 청년기자(청세담13기)